영화 ‘봄’(감독 조근현)은 감각적인 작품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 들판 위의 곡식과 강, 하늘, 그리고 배우가 연결되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예술 작품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미술감독 출신인 감독의 노력이 고스란히 들어갔다. 배우들의 연기도 강렬한 인상을 더한다. 감독의 역량 덕이겠지만 영상과 배우가 이리도 조화로울 수 있을까? 이 요소들은 영화가 강조하는 것처럼, 아름다움의 정의를 내려준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 최고의 조각가 준구(박용우)는 이제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폐인 같다. 아내 정숙(김서형)은 끝까지 남편에게 삶의 의지를 찾아주려고 노력한다. 남편이 예술의 혼을 불사르게 하기 위해, 가난과 폭력 아래 근근이 살아가는 민경(이유영)에게 누드모델 제의를 한다. 순수한 이유건, 불순한 의도건 세 사람은 서로에게 삶의 희망이 된다. 다시 찾아온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영화는 시종 잔잔하게 흘러가며 관객을 몰입시킨다.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주인공들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 같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힘들었던 그들의 삶은 어느새 아름답게 변해간다. 그 과정이 스크린에 오롯이 나타난다.
누드모델이라는 설정이기 때문에 신예 이유영의 노출이 어쩔 수 없이 필요,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야함’과는 거리가 멀다. 조각가는 자신이 원하던 모델과 정신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 교감 과정이 드러날 듯, 아닐 듯 조금씩 관객의 감정을 일렁이게 한다. 조각가 아내의 사랑 역시 순수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엇박자로 삐끗거릴 수도 있던 영화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어떤 방향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전개되는 방법과 이야기는 관객의 마음을 송두리째 훔쳐간다. 무엇을 해도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극단의 선택도 이해가 가는 이유다.
기존의 이미지를 깨버리고 웃는 것과 행동하는 것 하나하나까지 달라 보이는 박용우와 김서형의 디테일한 연기도 좋지만, 신예 이유영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줘야 한다. 민경의 삶에 빙의된 그는 러닝타임 102분 동안 관객을 전율케 한다. 오묘한 매력은 끝까지 유지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신체의 매력이 아닌, 전체적으로 풍기는 멋이다.
이유영이 툭 하고 던지는 대사들은, 힘든 현실이지만 순응하며 살아가는 민경처럼 보이면서도, 환상에 사는 여인 같은 느낌을 전한다. 발음과 톤이 새롭게 느껴지는데, 이는 관객을 끌어당기는 힘이기도 하다. 감정 조절 연기도 탁월하다. 이유영은 이 영화를 시작하게, 또 끝맺음할 수 있게 한다. 여배우의 노출과 폭력 등 선정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은 영화가 전하는 화면과 배우들에 의해 순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게 하는 특별함을 전한다. 이유영은 언론시사회 후 진행된 간담회에서 “시나리오에 눈이 멀어 노출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사람의 몸에서만 아름다움을 찾으려던 준구가 “눈과 표정을 통해야 사람이 화가 났는지 즐거워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민경의 순수성 덕에 깨달음을 얻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영화는 여름 끝에 봄이 왔다고 홍보한다. 당연히 가을이 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봄은 계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생의 가장 찬란했던 봄을, 세 인물을 바라‘봄’만으로도 경이롭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재미적인 요소는 부족하지만, 아름다움에 방점을 찍는다.
지난 1월 산타바바라 국제 영화제를 시작으로 아리조나, 밀라노, 달라스, 마드리드, 광주, 도쿄 등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 여우주연상, 촬영상을 받는 등 이미 국내외에서 주목받았다. 청소년관람불가. 11월20일 개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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