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유지혜 기자] 배우 박해준은 ‘차가운 도시 남자’의 외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반전이다. 구수한 부산 사투리에, 차갑기는커녕, 세심하고 웃음도 많다. 현실주의자 천 과장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박해준은 tvN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임시완 분)의 상사이자 영업3팀에 뒤늦게 합류한 천 과장 역할을 맡았다. 첫 등장이 11월 중순이니, 극의 딱 절반 즈음에 촬영장에 나타난 셈이다. 이미 영업3팀으로 인기를 얻고 있던 이성민, 김대명, 임시완 라인에 ‘끼어들게’ 된 것에 부담감은 없었을까. “배우들 간의 정이 정말 돈독하다”고 아쉬움을 드러내던 박해준이 질문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들어가게 돼 기존 영업 3팀의 ‘케미’를 흩뜨릴까봐 걱정했다. 등장도 늦게 했고, 워낙 좋은 드라마다보니 ‘무언가를 해내야겠다’는 욕심과 부담감이 동시에 들었다. 그런데 첫 촬영부터 하루 종일 촬영하고 세 시간 자고 나와서 다시 촬영해야 하는 강행군이더라. 한창 바쁘게 찍을 때 제가 투입돼서 그런 건데, 적응하는 것에도 정신없는데 연기도 해야 하니 솔직히 정말 힘들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새도 없이 정신없이 촬영하다, 조금 지나니 익숙해지고, 순발력을 발휘해서 촬영할 부분과 많은 준비를 거쳐서 찍어야할 부분이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니 좋아지더라. 이제 조금 여유가 생기려니 끝이 나버렸다.(웃음)”
욕심을 내려놓고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됐다고 웃는 박해준에 영업3팀과의 호흡을 물었다. 그는 “보시다시피”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잘 따라주는 동생들과 잘 이끌어주시는 선배님이 계시는데 뭐가 더 필요하겠냐고 반문할 정도다.
“영업3팀 호흡은 정말 좋았다. 어떤 장면을 해야 한다고 하면, 알아서 척척 자리 배치가 되고 손발이 착착 맞는다. 제가 들어가기 정말 좋은 팀이었고, 저는 그냥 몸을 맡기면 됐다. 그걸 보면서 누군가는 ‘날로 먹는다’‘무임승차를 했다’는 평도 하더라. 하지만 저도 나름 열심히 했다.(웃음) 이성민 선배님께서 전체를 보는 넓고 경험이 많아 ‘우리 이런 식으로 해보자’라고 하시는 편이었다. 그럼, 정말 직급에 맞게 일하는 것처럼 착착 돌아갔다. 김대명, 임시완, 두 동생이 정말 잘 따라줬다.”
영업3팀의 호흡은 척척 맞지만, 천 과장은 사실 영업3팀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최 전무(이경영 분)에 보고해야 하는, 일명 ‘끄나풀’과 같은 역할이다. 그도 살아남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사맨’이기 때문이다. 끄나풀을 자처할 만큼 현실적인 천 과장 역할을 하는데 고충은 없었을까. 박해준은 “절제가 가장 힘든 역할이었다”고 털어놨다.
“천 과장을 연기하면서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삶의 표현들을 포기하고 사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얘기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얘기를 하기 싫은데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지 않냐. 천 과장은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비애가 있다. 또한 그는 분명 악역은 아니다. 단지 워낙에 영업3팀이 회사원의 판타지를 보여줬다면, 천 과장은 ‘조직생활은 이래야 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그 안에서 판타지를 걷어내려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사실 천 과장도 그 판타지를 원할 거란 말이다. 그럼에도 쓴 소리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위치다. 그런 면에서 천 과장은 참 안타까운 인물이었다.”
사실은 극중 가장 안타까운 인물 중 하나가 천 과장이라며 자신의 캐릭터를 두둔하는 박해준. 그만큼 역할에 애착을 가진 그는 “대본을 받기 전 기댈 데라고는 원작 밖에 없었다”고 말할 만큼 원작을 많이 읽었다고 답했다. 많은 반응들 중에서 원작 속 천 과장보다 훨씬 잘생겨서 급기야 영업3팀이 ‘비주얼팀’이 됐다고 말하니 “생긴 걸 어떻게 하냐”며 너스레를 떤다.
“원작 속 천 과장의 무언가도 선택할 수 없는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 혼란스러움으로 원작 천 과장과의 싱크로율을 맞추고 싶었다. 물론, 아쉬운 부분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하지만 단단하진 않더라도, 드라마의 한 블록을 끼워 맞췄다는 생각, 마지막까지 제몫을 했다는 생각은 한다. 또한 원작 속 천 과장에 아직도 마음이 많이 쓰이지만, 이제는 원작과 드라마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할 시점이라고 여긴다. 드라마 속의 천 과장은 어쨌든 저이기 때문에 싱크로율 면에서는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다.”
그는 사실 이번 드라마가 두 번째다. 이전 SBS ‘닥터이방인’에서는 북한군 차진수 역할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천 과장이 오 차장과 얘기를 나누다 갑자기 총을 꺼내들고 ‘박후니’를 외칠 것 같다고 반응할 정도다. 박해준은 이 반응을 듣고 호탕한 웃음을 짓다 “저도 사무실이라 참았다”며 금세 농담을 던진다.
“연극은 오래 전부터 했지만, 영화 데뷔도 2012년 ‘화차’로 했다. 짧은 시기 안에 좋은 드라마에 좋은 역할로 출연할 수 있었다는 것만큼은 운이 좋았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제 팔자가 좋은 건가 싶다.(웃음) 아직은 몇 작품 하지 못해서 카메라 앞에서는 어색하고 떨리는 게 아직도 있다.”
천 과장은 사실 ‘미생’에서 절반 정도 밖에 등장하지 않은 만큼, 배우로서 천 과장을 드라마 전체에 걸쳐 그려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을 터. 이에 시즌2에 등장할 천 과장에 바라는 모습이 있는지를 물었다. 박해준은 “시즌2에 천 과장 캐릭터가 다시 나와서 저를 불러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하면서도 “바라는 것은 승진?”이라고 장난기 넘치는 대답을 덧붙였다.
“바람이 있다면, 시즌2에서 천 과장이 조금 더 자기 색깔을 냈으면 좋겠다. 지금 천 과장은 갈림길에 있다. 좀 더 욕심을 내서 최 전무처럼 되던가, 오 차장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던가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사람은 잘 안 변하지 않나. 그래서 천 과장은 시즌2에도 또 ‘천 과장 짓’을 하고 있을 것 같다.(웃음)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천 과장이 지금의 천 과장보다 더 ‘천 과장’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직급은 한 두 세 계단 정도 올라갔으면 좋겠다. 천 차장 정도?(웃음)”
오랜 기간 연극에서 다져온 내공을 브라운관과 스크린 위에서 마음껏 뿜어내고 있는 배우 박해준. 웃음 많은 그는 인터뷰 내내 위트 있는 농담을 던지다가도, 진지할 때에는 “커피에 술이 들어간 것 같다”고 말할 만큼 진중하고 솔직해졌다. ‘닥터이방인’의 차진수도, ‘미생’의 천 과장도 잊히지 않는 캐릭터로 만들어낸 박해준이 다음에는 또 어떤 ‘희대의’ 캐릭터를 만들어낼지 궁금해질 뿐이다.
유지혜 기자 yjh0304@mkculture.com/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
사진=곽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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