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MBC 일일드라마 ‘압구정 백야’의 남자주인공 장화엄은 세상에 둘 도 없는 완벽한 남자였다. 잘생긴 외모에 남부럽지 않은 재벌가의 아들이자, 직업 또한 잘나가는 PD이다. ‘완벽주의자’ 성향도 있지만 성격마저 남자다우면서도 ‘가진 자의 횡포’를 부리지 않는, 그야말로 ‘백마탄 왕자님’ 그 자체였다.
“장화엄이라는 인물은 정말 연기하기 힘든 캐릭터였다. 너무 완벽하다보니 인간미가 없는 로봇처럼 느껴지더라.”
말은 그렇게 해도 ‘압구정 백야’가 세운 대장정을 마친 강은탁은 극중 장화엄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묘한 매력을 지닌 배우였다. 선이 굵은 외모와 중저음의 목소리, 진지하고 성실한 답변까지는 극중 장화엄과 비슷해 보였지만, 인간 강은탁의 성격은 장화엄보다는 조금 더 익살스럽고 인간미가 넘쳤으며, 유쾌했다.
실제로 극중 장화엄과 얼마나 비슷하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화엄은 돈도 있고 안정된 직업도 있고 집안까지 좋은 남자인데, 나는 전혀 아니다”고 웃었다. ‘압구정 백야’에서 완벽한 장화엄을 연기하느라 힘들었다고 털어놓은 강은탁은 100% 만족할 수는 없지만, 그 어느 때보다 역할에 몰두한 만큼 작품에 거는 애정은 매우 컸다.
↑ 사진=이현지 기자 |
“부족함 없는 화엄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 완벽남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캐릭터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싶어 정말 막막하더라. 정말 힘들었고, 매일 같이 고민했다. 너무 답답해서 하루는 임성한 작가에게 ‘화엄이라는 인물을 진짜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대본을 뚫어질 때까지 파라’였다. 그래서 더 이상 팔 수 없을 때까지 대본을 팠다. 처음에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놈이라서 대본만 보면 숨이 턱 막혔고, 연기를 하는데 있어서도 재미가 없었다. 글자 그 자체로 봐서는 알 수 없었던 대본인데 수많은 가설을 세우고 이를 풀어나가다 어느 순간부터 화엄이 보이더라. 힘들었던 만큼 화엄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크다. 아마 죽을 때까지 기억에 남지 않을까 싶다.”
애정이 많은 만큼 헤어짐이 아쉬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압구정 백야’ 종방영 때 모두 앞에서 ‘안녕하십니까. 마지막 임성한의 남자입니다’라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고 말한 강은탁은 인터뷰를 하는 그 순간에도 화엄과의 이별이 아쉬운 듯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끊일 줄 몰랐다.
강은탁은 ‘스타메이커’로 불린 임성한 작가에 있어, 매우 특별한 배우 중 한 명이다. 바로 임성한 작가의 은퇴작인 ‘압구정 백야’에 출연하면서 ‘마지막 임성한의 남자’라는 특별한 별명을 얻게 됐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내가 ‘임성한의 마지막 남자’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물론 알았든 몰랐든 최선을 다했을 테지만, 그래도 촬영 중 ‘압구정 백야’가 임성한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 아쉽기는 하더라. 미리 알았으면 더욱 동기부여가 됐을 텐데 싶기도 했고. 은퇴작이라는 소식을 듣고 임성한 작가의 연대기를 훑어 봤는데 기분이 묘하더라. 어찌됐든 한 세대를 풍미했던 작품이고, 내가 그 작가의 마지막 작품에 출연했다는 사실이.”
↑ 사진=이현지 기자 |
강은탁에게 임성한 작가 작품의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던 것은 KBS2 아침드라마 ‘순금의 땅’에 출연할 때였다. ‘순금의 땅’에서 강우창 역으로 안정적이면서도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던 강은탁은 임성한 작가가 원했던 배우상 그 자체였다. 임성한 작가가 선호하는 선굵은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연기력까지 받쳐줄 뿐 아니라,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지도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선한 배우를 원하는 임성한 작가에게 강은탁은 그토록 찾았던 새 드라마의 주인공 그 자체였던 것이다.
“‘순금의 땅’ 촬영이 한창 진행됐을 때였다. 어느 날 배한천 PD님으로부터 ‘한번 보자’고 연락이 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PD님 뵐 생각에 아무것도 모른 채 미팅 장소에 갔는데, 그 자리에 그 유명한 임성한 작가가 있는 것이 아닌가. 첫 만남 당시 얼마나 긴장했던지, 정말 떨면서 이야기했었다. ‘왜 저인가’라고 물었더니 ‘순금의 땅’을 보면서 강은탁이라는 배우가 궁금했다고 하시더라. 이후 기사를 통해 내가 ‘임성한의 남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처음에는 도무지 실감이 안 나더라.”
임성한 작가는 옛날부터 신인 혹은 연기력은 있지만 인지도가 약해 기회를 얻지 못하는 중고 중고신인들을 과감하게 기용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출연=성공’은 아니지만, 임성한 작가 작품을 통해 장서희, 이다해, 이태곤 등 많은 배우들이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새로운 기회를 얻어왔다. 임성한 작가의 작품은 신인배우들에게 있어서 등용문과 같으며, 인기를 얻는 엘리베이터 역할을 해 왔었다.
하지만 그만큼 따라오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바로 ‘막장의 대모’로 유명한 임성한 작가의 작품인 만큼, 자칫 잘못하다가는 배우의 이미지 손실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례로 ‘압구정 백야’의 전작인 ‘오로라 공주’의 경우 남자주인공인 황마마(오창석 분)를 비호감 캐릭터로 만들더니, 후반부에 가서는 교통사고로 사망시키는 충격 전개를 선보이기도 했다.
“주변의 만류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내가 왜 피해야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큰 임성한 작가가 찾아 준다는 것 자체가 배우 인생에 있어 언제 다시 올 줄 모르는 큰 기회였다. 출연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주위에서 ‘중간에 죽는 거 아니냐’며 걱정 아닌 걱정을 많이 했는데, 개의치 않았다. 극중에서 나라는 캐릭터가 죽어야 드라마가 재미있다면 죽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어찌됐든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을 그렇게 바로 죽이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 사진=이현지 기자 |
많은 이들의 우려 속 강은탁은 ‘압구정 백야’의 출연을 결정하게 됐다. 하지만 좋은 일 끝에는 슬픈 일이 뒤따른다고 했던가. 지상파 일일드라마 주인공으로 확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은탁은 아버지의 부고를 접하게 됐다.
“드라마에 캐스팅 됐다는 소식에 가장 기뻐하셨던 사람은 부모님이셨다. 그때는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였는데…‘순금의 땅’ 끝나고였다. 생애 첫 미팅을 무사히 마친 후 갑자기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그리고 매니저 형이 오더니 날 갑자기 차에 태우더라. 그리고 도착한 곳이 병원 영안실이었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맛봤다. 원채 길게 투병을 하셨기에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갑자기 소천하실 줄은…그래도 장남 생일이 제삿날이 되면 안 된다고 이틀을 더 버텨 주셨더라. 일일연속극에 캐스팅 소식을 들으시고 굉장히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는 아침이 아닌 밤에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하셨는데…그래도 하늘에서 지켜보시고 좋아하셨을 것이라 믿는다.”
‘압구정 백야’에서 가장 크게 얻게 된 것은 바로 사람이었다. 배우를 비롯해 모든 제작진, 그리고 임성한 작가까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며 자랑한 강은탁은 “‘압구정 백야’는 정말 좋은 사람들만 모인 드라마 팀”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비밀주의’ 콘셉트를 유지하는 임성한 작가에 대해서는 “따뜻하면서도 뚝심이 있는 작가”라고 평했다.
“임성한 작가와 관련해 세상에 알려진 것과 반대되는 부분이 많다. 그냥 똑같은 사람이고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잔정이 많고 여리신 분이시다. 생각보다 따뜻하고 자상하시다. 주연배우 뿐 아니라 아주 작은 단역마저 한 신이라도 나올 수 있도록 배려하신다. 배우 개개인의 개인적인 상황을 고려해 주시기도 한다. 예를 들어 원근이의 경우 당시 뮤지컬을 하고 있었는데 뮤지컬 분량이 많으면 드라마 대본 분량을 줄어주기도 하시더라. 임성한 작가에 대한 편견이 많이 있는데 사람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 아니냐.”
↑ 사진=이현지 기자 |
임성한 작가하면 따라오는 존재가 있다. 바로 임성한 작가의 조카이자 배우 백옥담이 그 주인공이다. 대부분의 출연작이 임성한 작가의 작품인 백옥담은 그동안 ‘조카 편애 논란’ ‘특혜’ 논란에 시달리기도 했다. 임성한 작가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비밀인 백옥담은, 임성한 작가의 은퇴 선언 이후 ‘고모따라 은퇴하는 것이 아니냐’는 시선을 받아왔다.
“백옥담이라는 배우에 대해 오해가 많은데 굉장히 착하고 맑은, 모나지 않은 친구다. 연기도 곧잘 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임성한 작가가 은퇴했으니 백옥담도 은퇴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을 하는데, 사실 나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동안의 필모그래피가 임성한 작가 작품에 편중돼 있었다는 점, 그 외에 작품에서는 연기력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앞으로 백옥담이 극복해 나가야 하는 부분이지만 벌써부터 그 앞길을 미리 막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계속해서 연기를 하는 만큼 좋은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
‘압구정 백야’에서 장화엄은 백야(박하나 분)와 함께 러브라인을 이어왔다. 강은탁이 “장화엄은 바보”라고 할 정도로 극중 장화엄은 백야를 얻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맹목적이면서도 뜨거운 사랑을 하는 순정남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장화엄을 보면서 실제 강은탁의 연애스타일에 대해 궁금해 졌다.
“쉽게 설명하자면, 저는 장화엄의 사랑방식과 전혀 다르다. 전 제 나이에 맞게끔 해본 것 같다. 강은탁의 사랑은 장화엄의 정반대다. 전 나쁜남자도 착한남자도 아니고,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같다. 나이가 드니 이상형도 희미해졌다. 어릴 때는 여느 남자들처럼 이상형이 자주 바뀌었는데 이제는 외모보다 그냥 말이 통했으면 좋겠다. 있는 내 모습 그대로 이해해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상대방을 만나고 싶다.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데, 배우로서 삶을 응원해 주고 믿어주는 그런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시간, 강은탁에게 다음 활동 계획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고 싶은 연기는 참 많은데, 그 중 하나를 꼽아본다면 사연이 있고 악행을 하더라도 이해가 가는 그런 악역을 해보고 싶다. 그런데 일단 가장 이루고 싶은 건 ‘압구정 백야’보다 더 성숙한 나은 연기로 시청자 분들께 다가가는 것이다.”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