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이다원 기자]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촉망받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지난 2011년 사망하기 직전 그가 남긴 쪽지만으로도 궁핍한 정도를 짚어볼 수 있다. 이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화살이 정부로 쏠리자 일명 최고은법으로 불리는 예술인 복지법이 부랴부랴 마련됐다. ‘누군가 죽어야만 바뀌는 나라’라는 말은 더이상 우스개소리가 아니었다.
예술인의 기본 생존권을 보호하고 복지를 보장하는 예술인 복지법은 최근 배우 김운하와 판영진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또 한 번 도마 위에 올랐다. 법안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해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는 비난도 일었다. ‘유명무실’한 예술인 복지법은 대체 누굴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 사진=판영진 SNS, 극단 신세계, 디자인=이주영 |
◇ ‘삭제 또 삭제’…누더기 된 예술인 복지법
예술인 복지법이 처음부터 제 기능을 못한 건 아니다. 그러나 2011년 11월 법안 통과 과정에서 예술인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근거인 근로자 의제, 예술인복지기금 등이 삭제되면서 그 의미가 변질됐고, 이후 여러 번의 개정을 거치면서 본래 취지와 달리 법안 곳곳에 구멍이 났다.
또한 예산 지원 여부도 ‘국가 또는 지자체는 예산의 범위에서 예술인의 복지 증진을 위한 사업과 활동에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예술인 복지법 제4조 3항)고 규정해 강제가 아닌 유사시 정부나 지자체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고 있다.
이는 예산이 편성돼도 국가나 지자체의 승인이 없다면 예술인들이 수혜를 입을 수 없는 구조다. 일각에서는 올 상반기가 지나도록 수혜자가 단 1명도 나오지 않은 이유가 이런 비현실적인 법제에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일부러 그랬나’…쉽게 다가갈 수 없는 ‘복지법’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마련한 예술인활동증명 시스템도 오히려 예술인의 참여율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빚었다. 근로계약 및 고용보험 의무 조항이 삭제되면서 예술인경력증명 시스템으로 변경됐지만 그 기준이 굉장히 까다로워 접근하기가 어려울 정도. 만 3년간 세 작품 이상 작업했다는 서류를 제출해야 하지만, 구비 서류가 무척이나 많고 복잡해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국가가 왜 예술인 자격을 판단하느냐’는 자존심 때문에 신청하지 않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예술인 경력증명을 한 후에도 복지법 혜택을 받기 위해선 또 한 번의 절차를 걸쳐야 한다. 창작준비금지원 사업 지원시 신청 예술인의 예술활동, 소득, 건강보험료 등 기초 자료를 제출해야 심의를 받을 수 있다. 또한 부모나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면 이들을 대상으로도 위의 서류가 첨부돼야 한다. 만약 가족 중 기준 이상의 소득이 있다면 비록 예술인 당사자가 곤란한 처지에 있어도 구제를 받을 수 없다.
통과가 된 이후에도 문제다. 300만원 가량의 지원금을 받기까진 2-3달의 심사기간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 예술인 생계를 보호하기 위한 긴급지원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현재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2015 창작준비금지원사업 참여 모집을 마쳤다. 심의 이후 예술인 약 3150명에게 1인당 300만원씩 3개월간 지급할 예정이다. 그러나 지난달까지도 사업 진행 움직임이 전혀 없다가 판영진, 김운하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 8일 만에 부랴부랴 모집 공고를 냈다는 점은 아쉬운 뒷맛이 남는 부분이다.
이다원 기자 edaone@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