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이다원 기자] “어릴 적부터 스포츠를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SBS 스포츠 중계석 안방마님 이현경 아나운서의 입에선 예상외의 말이 나왔다. 깔끔한 진행으로 리듬체조, 볼링, 피겨스케이팅 등 섬세함이 살아있는 스포츠 종목들을 도맡아온 그가 실제론 스포츠를 즐기는 건 아니었다니! 그렇다면 믿고 듣는 캐스터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뭐였을까?
“무조건 보고 듣고 서적을 파면서 배웠어요. 낯선 용어, 전문적 지식 등을 습득하기 위해 해외 원서는 물론 스포츠 방송도 끊임없이 모니터링했죠. 제가 꾸준히 하는 건 자신 있거든요?”
대기만성형 아나운서 이현경에게 19년간 걸어온 아나운서로서 삶을 들어봤다.
↑ 디자인=이주영 |
◇ 키워드 총평 : 이현경, 배워야 산다
키워드1. 여자 캐스터, 여자 배기완
여자 아나운서로는 드물게 캐스터로서 자리 잡은 그는 탁월한 중계 실력으로 ‘여기완’(여자 배기완)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그만큼 여자 캐스터로서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때 체조를 제외하고는 해설위원 없이 중계해야 하는 종목들을 담당했어요. 리듬체조, 다이빙,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등이었는데 해설위원이 없다보니 적어도 입은 떼야겠다 싶어 규정집을 들고 파기 시작했죠. 구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관련 사이트가 다 영어라 전부 해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어요. 겨우 해석을 해도 관련 지식이 없다보니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그럴 땐 관련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규정집과 대조해서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익혔죠. 비디오테이프 시대라 예전 선배들의 중계 영상을 찾아보느라고 편집실에서 살다시피 했었고요. 대본이 없으니 외국 문헌도 번역하면서 공부하니 사람들이 ‘여자 배기완’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키워드2. 해설자 껌딱지
그가 전문성을 획득하는 데엔 해설자들을 쫓아다니며 공부한 열성도 한몫했다.
“도하 아시안 게임 때 처음으로 해설자와 함께하는 종목이 체조였어요. 다른 종목들이 칙칙한 ‘남자 캐스터+남자 해설자’ 조합인 반면 체조만 유일하게 여자 캐스터+남자 해설자 조합이었죠. 당시 박종훈 체조 해설위원에게 많이 배웠어요. 방송이 없을 때도 대회기간 내내 붙어 다녀서 ‘부부냐’는 놀림도 받았고요. 하하. 하지만 중계 후 각자 심의평가나 시청자 게시판을 보면서 혹독하고 비판을 나누면서 ‘윈윈’했죠. 그 덕분에 우리 열공(?) 조합은 베이징, 런던 까지 이어지면서 함께 늙어가는 종합대회 공식 커플로 인정 받고 있는 상태에요. 평소에도 꾸준히 연락하며 관련 종목 정보를 주고받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답니다. 또 동계 올림픽 땐 피겨, 컬링, 썰매 종목을 담당했는데, 피겨의 방상아 해설위원 역시 늘 붙어 다니며 단짝 우애를 자랑하고 있죠.”
↑ 사진=SBS |
키워드3. 생방송, 그 아찔한 맛
스포츠 중계의 묘미는 바로 돌발 상황이 비일비재한 생방송에 있다. 그 역시 남자캐스터가 가득한 스포츠 중계석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도 이 아찔한 맛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방송 도중 경기가 지연될 땐 빨리 정신 차리고 그 당시 상황을 최대한 침착하게 묘사하고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 지, 심판들의 움직임이나 감점 요인 등을 해설위원과 짚어나가야 해요.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대신 풀어드려야 하니까요. 이런 상황은 4년을 기다리고 준비한 선수들에게도 당황스럽겠지만 캐스터인 저도 참 당황스럽거든요. 또 볼링 생중계 도중에 예상보다 경기가 일찍 끝나서 시간이 많이 비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땐 급작스럽게 우승 선수 인터뷰를 하거나 해설위원과 경기 상황을 다시 짚어 드리면서 무마하죠. 생방송의 이런 아찔한 묘미 때문에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도전하게 되는 것 같아요.”
키워드4. 이현경은 '뚝심녀'
스스로의 강점을 ‘뚝심’이라고 꼽았다. 남자 위주로 시스템된 스포츠 중계 세계에서 살아남은 건 이런 기질 때문이라며 웃는 그다.
“스포츠 중계는 지방이나 해외 출장을 가도 헤어와 화장은 자체 해결해야 해요. 예쁘게 나오는 건 포기해야 하죠. 예전엔 제작비를 아끼느라 숙소도 지방의 허름한 모텔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어요. 정육점 조명에 물침대, 새벽에 소음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고요. 하하. 여성인 저를 배려한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의 환경이고 돌발 상황이 많다보니 제작진들도 선후배 따질 겨를이 없이 가끔은 말도 거칠게 나간 적도 있어요. 그래서 종합대회 출장은 꼭 한번 씩은 심하게 앓거나 힘들어서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속출하죠. 저도 예외는 아니었고요. 하지만 방송만 무사히 나가면 되지 하고 버텼더니 여기까지 왔네요.”
↑ 사진=SBS |
키워드5. 변화의 계기 '김연아'
그가 초년병 시절을 회상하며 ‘너무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았다’는 답을 내놨다. 그에 비해 이제야 안정감을 찾은 것 같다고. 그 변화의 중심엔 전 피겨 스케이팅 선수 김연아가 있었다.
“김연아 선수는 정말 걸출한 인물이죠. 피겨 스케이팅이 비약적 발전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중계를 맡은 제가 더 부담감을 지닐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가 김연아 이후 일명 ‘김연아 키즈’들이 나오면서 이젠 이들을 잘 육성해야하는 상황으로 바뀌었잖아요. 저 역시 예전보다는 부담감이 덜하고 피겨를 즐길 수 있게 되더라고요. 관중들도 선수들에게 ‘우쭈쭈’하는 하는 분위기라 캐스터에 대해 관대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키워드5. 캐스터를 꿈꾸는 후배에게
여자 아나운서 중 캐스터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듣는 말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캐스터를 꿈꾸는 여자 후배 아나운서들이 있다고 해서 좀 놀랐어요. 적잖은 후배 아나운서들에게 캐스터 도전을 권유했지만 이후로 캐스터 하겠다는 후배들이 없었거든요. 사실 얼굴도 잘 안나오고 실수하거나 준비를 게을리 하면 바로 들통 나는 녹록지 않은 분야니까요. 만약 정말 캐스터를 꿈꾸는 후배들이 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한국은 동, 하계 스포츠 강국으로 확실히 자리 잡았고 시청자 분들이 다양한 종목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데다가, 관련 정보도 많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나이가 들어서도 커리어를 인정받을 수 있는 분야이기 만큼 한번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키워드5. 이현경, 한 문장으로 줄이면?
오랫동안 캐스터 혹은 아나운서로서 길을 걸어온 그에게 한 문장으로 자신을 요약해보라고 했다. 잠시 생각한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느리지만 천천히 가는 아나운서. 대기만성형? 센스 있게 팍팍 진행하진 못하지만 길게 가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지금 만족 지수요? B+정도! 아직도 전 발전할 여지가 있으니까요.”
[이현경은 누구?] 1973년생으로 고려대학교 영어교육학을 졸업한 뒤 1996년 SBS 공채 아나운서로 방송가에 입문했다. 이후 SBS 런던 올림픽 캐스터 등 스포츠 중계를 도맡아 하면서 여성 캐스터로서 실력을 입증했다. 또한 2010년 한국 아나운서 대상 스포츠캐스터상을 타기도 했다.
이다원 기자 edaone@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