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유지혜 기자] “이런 경험들이 정말 다 처음이에요.”
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얼굴에 슬쩍 설렘이 엿보인다. 연차로는 이미 ‘대선배’의 느낌이지만 그가 이토록 대중과 가까웠던 적이 있었던가. 어느 새 길을 가다 만난 시청자들은 그에게 “학주”라고 부르게 됐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게 됐다. 배우 유재명은 이런 모든 변화들이 신기할 뿐이다.
지난 1월 종영한 tvN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에서 유재명은 류동룡(이동휘 분)의 아버지이자 학교의 ‘학주’ 류재명 역을 맡았다. 캐릭터의 특성을 더욱 살리기 위해 ‘류재명’이 된 탓에 실제 이름도 류재명으로 알고 있는 시청자들이 꽤나 많다. 유재명은 아직 채 ‘응팔’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 사진제공=샛별당 엔터테인먼트 |
“정말 ‘응팔’로 큰 사랑을 받았다. 얼마 전 ‘꽃보다 청춘’으로 후배들이 여행을 떠나 화제가 되기도 하고. 여운이 계속 남는 것 같다. 길 가다가도 아직 제게 ‘동룡이 아버지’ 혹은 ‘학주’라고 많이들 부르시더라. ‘학주’라는 단어가 가진 딱딱한 느낌이 아닌 정감을 표현하는 별명이라 전 그렇게 불리는 것도 참 좋다. 제게 좋은 닉네임이 생긴 것 같다.”
‘응팔’이라는 작품에 합류해 닉네임까지 생긴 유재명은 사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이렇게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잘 모르고 있었단다. 그저 ‘아, 이슈가 되는 구나’ 혹은 ‘신선한 배우들이 나온다더라’ 정도의 느낌이었지, 이렇게 그 인기를 체감할 줄은 몰랐다고.
“이렇게 반향을 일으키는 건 예상 못했는데 방송이 나가고 나니 관심이 엄청나게 쏟아지는 걸 보면서 한편으로는 부담도 됐다. 더 잘해야겠단 생각, 더 많은 걸 보여줘야겠단 책임감이나 부담감이 생긴 건 사실이다. 중반 이후로는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찾았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야겠다 싶더라. 저란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인지도를 올리고, 모든 캐릭터를 빠짐없이 사랑해주셔서 시청자들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는 ‘응팔’에서 학생들 앞에서는 근엄하지만 늘 까불거리는 류동룡처럼 쌍문동 ‘아재들’끼리 있는 자리에서는 개다리춤을 추는 친근한 ‘학주쌤’으로 변신했다. 특히 그렇게 춤추는 장면들이 시청자 사이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는데 유재명은 “저희 어머니께서도 방송 보고 ‘너 왜 이렇게 춤 잘 추냐’고 묻기도 하셨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 사진=응답하라 1988 방송 캡처 |
“류재명 캐릭터는 신원호 감독님과 대화를 통해 엄하되 학생들을 자식처럼 느끼는 따뜻함이 깔려있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처음엔 그런 부분을 보여드릴 신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동룡이와의 관계에서 대사, 시선 하나에 간접적으로 따뜻함을 녹여내면서 비로소 류재명이 완성된 것 같다. 춤 장면을 통해 ‘쌍문동 춤꾼’이었던 동룡이와의 연결고리도 생기고 류재명이 좀 더 입체적이게 되고 탄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응팔’은 다양한 세대의 후배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더욱 남달랐을 것이다. 유재명은 류혜영, 류준열, 혜리와 같은 후배들을 일일이 거론하며 애틋한 마음을 전했다. 20부작 동안 함께 했고, 포상휴가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온 탓에 더욱 그 애틋함은 진한 것 같았다. 이제는 ‘형 동생’ 다 됐다며 후배들을 언급하는 류재명의 표정에 아쉬움이 한가득 묻어났다.
“‘응팔’은 대본이 참 좋았다. 배우를 믿고, 그 배우의 개성을 뽑아내는 그런 천재적인 조합이 있었다. 각 배우들에 맞춤옷을 입혔다고 해야 하나. 덕선이도, 동룡이도 정말 그 자체였다. 20부작이란 작품 안에 사람들이 다 그 캐릭터로 변한 것 같더라. 쌍문동 식구들이 정말 가족이 되고. 휴가 갔을 때에도 서로 ‘이제 언제 보지’ 이러면서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쓸쓸한 느낌을 받았다. 참 좋은 후배들, 동료들을 만났다.”
모든 배우들이 ‘응팔’을 통해 바뀌었다고 말하는 유재명은, 그 중에서도 가장 신변의 변화가 많은 축에 속하는 배우였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그의 열애가 대서특필 되고, 포상휴가까지 다녀왔다. “공항패션으로 화제가 된 것도 처음”이라고 말하는 유재명은 지금 팬들에 해주는 사인도 최근에 예술 감각이 있는 형님에 ‘하나 만들어달라’고 요청해서 만든 새 사인이라고 말했다.
↑ 사진제공=샛별당 엔터테인먼트 |
“‘응팔’을 통해 처음 하는 게 참 많다. 요즘은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감사한 만큼 지금의 관심과 애정은 연기나 제가 꿈꾸는 ‘좋은 배우의 길’로 보여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겸손해지려고 마음 먹다보니 자연스럽게 행동이 조심스러워지는데, 때로는 ‘더 자신감 있게 살아야 하지 않나’ ‘나를 더 표현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참 기분 좋은 고민거리가 많아진 요즘이다.”
그런 유재명에 그 ‘고민거리’에 대해 물었다. 그는 연기를 할 때에는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이나 ‘내부자들’의 백윤식처럼 인간의 본성을 보여줘야 하는 게 배우 아니냐고 반문했다. 연기자란 운명이 그래서 멋있기도, 때로는 외롭기도 하다고. 유재명은 ‘마흔 중반의 일상적인 생활’과 그 ‘배우로서의 외로움’ 두 가지를 잘 운영하고 조율하면서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하는 게 자신의 몫이라고 설명했다.
“좋은 배우란 말은 ‘좋은 연기’를 가리키는 것도 있겠지만 그 사람만의 ‘멋스러움’을 가진 배우도 포함되는 것 같다. 그런 멋스러움을 통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극장 문을 열고 그 ‘시원한 바람’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게 좋은 연기가 아닐까. ‘잘 생겼다’ ‘멋있다’라는 말과는 또 다른 말인 것 같고, 더 본질적인 존재가 될 때 표현하는 말인 것 같다. 전 그런 배우가 되고 싶고, 후배들 중에서도 이런 ‘라이브’하고 ‘원초적인’ 배우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응팔’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는 전과 다름없이 연극과 독립영화의 러브콜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유를 물었더니 “대본이 좋으니까”라고 명쾌한 답을 내놨다. 예술영화가 예전보다는 보급화 됐지만 제도적이나 경제적 여건은 아직 많이 부족하다며 그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살아나야 더 좋은 배우들이 많아질 수 있을 것이라 강조했다.
↑ 사진=응답하라 1988 방송 캡처 |
“독립영화 혹은 저예산영화 같은 것을 왜 하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표현의 범위가 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넓은 범위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건 배우만의 특권이다. 저는 그 특권을 놓치고 싶지 않다. 물론 나도 대중적인 작품에 대한 욕심은 있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한 발 한 발은 작품이다. 나란 배우가 잘 할 수 있고, 확실하게 보일 수 있는 작품들이 있다. 그런 작품들에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흔쾌히 출연하는 거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난 딱 용돈은 45만 원만 있으면 된다. 집에서 촬영장 가서 연기하고 오는 길에 소주 한 잔 ‘탁’ 하는 일상을 살기엔 딱 맞는 돈”이란다. 그야말로 흥도 많고, 여유와 낭만이 있는 사나이다. 이런 ‘낭만의 배우’에게 2016년의 시작은 참 ‘아름다웠다’. 그는 “올 한 해도 참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참 뒤늦게 매력발산한 유재명의 2016년 소망은 어떤 게 있을까.
“저도 나 혼자 고민에 쌓여있고, 나 혼자 잘났다고 살았던 때가 있었다. ‘응팔’로 혼자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배웠다. 가족, 이웃, 사회, 관계를 생각하게 됐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던져준 작품이다. 저 역시 한 남자로서, 아들로서, 배우로서 2016년 감사하게 살면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들과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한 해로 만들겠다.”
유지혜 기자 yjh0304@mkculture.com/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
디자인=이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