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김진선 기자] 일루셔니스트 이은결이 자신의 이름을 철저하게 숨겼다.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면 관객석도 꽉꽉 채울 수 있을 테고, 굳이 다른 홍보를 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굳이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작가 EG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섰다. 쭉 뻗은 쉬운 길을 두고 구불구불 어렵게 가는 것처럼 보였다. 왜 굳이, 그렇게 힘들게 무대에 오르느냐는 물음에 이은결은 “그래야 했어요”라고 답하면서 짓궂게 웃는다. 무대 위 카리스마를 거침없이 내뿜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능청도,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루션과 무대, 창작에 푹 빠져있는, 영락없는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다.
“나흘 동안 꼬박 세 시간 잤어요. 몸이 안 부서지는 것을 보고 ‘나 아직 괜찮구나’ 싶었죠. 이 작품은 5년 넘게 기획한 거예요. 작년에 ‘디 일루션’ 끝내면서, 동시에 시작했죠. 계속 계획했던 것인데, 미루다 보니 할 수 있을 기회가 많지 않았고, 작년에 시작한다는 것에 의미를 뒀어요.
↑ 사진=두산아트센터 |
이은결은 최근 두산아트센터에서 ‘멜리에스 일루션-에피소드’(이하 ‘멜리에스 일루션’)이라는 무대에서 작가 EG로 무대에 올랐다. 조르주멜리에스를 오마주로 한 작품으로, 작가로서 새로운 시도가 돋보였다.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편집하고, 가공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조르주멜리에스의 흑백영화로 시작하는 듯 하지만, 곧 영화보다도 더 놀라운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마술을 뛰어넘어 일루션(Illusion),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 형상을 보이는 것들을 보는 것 같은 착각과 동시에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스토리의 개연성을 만들어냈다.
“이번 작품이 3분의 1일뿐이에요. 멜리에스가 장난감 가게에서 죽음을 맞이해요, 영화를 그만두고 외롭게 쓸쓸하게 평가받지 못한 채 죽었는데, 그렇게 다시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담았어요. 그런 멜리에스의 모습이 현재 제가 하는 고민과 일치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은결은 조르주멜리에스의 작품에서 자신의 고민을 발견했다. 과연 그의 어떤 모습이 이은결을 요동치게 한 걸까. 이은결은 “마술이라는 개념을 만든 사람, 극장 운영을 한 사람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새로운 기술을 해서 신비주의를 벗어난, 픽션을 만든 사람, 이 사람이 인생이 예술가서의 행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즉 예술과 마법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순수예술도 초반에는 주술에서 시작했어요. 예술로서 분리해 가는 과정에도 마술을 늘 함께했죠. 주술로서, 의식으로서의 마술을 신비주의로 만들려는 행보가 있었고, 결국 마술은 트릭에 추종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거죠.”
그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대를 이번 ‘멜리에스 일루션’을 내보였다. 흔히 마술은 눈앞에서 보기만 해도 놀랍고 신기하다. 상상력을 자극하기보다, 시각적인 효과로도 충분히 즐겁기 때문이다. 이은결은 이 같은 현상을 ‘영화’에 빗댔다.
“영화가 기술의 혜택을 받고는 보이는 것의 한계가 없어졌어요. 초기단계의 영화를 보면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 많았는데 요즘은 느낄 수가 없잖아요. 영화는 마술의 흐름으로 만들어낸 또 다른 장르라고 생각해요. 영화의 처음은 마술이었고, 마술이 예술로서 튼 것도 영화의 탄생이죠. 마술은 본질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아요. 본질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죠. 지금은 한 부분만 보게 되는데 현상 위주로 영화라는 것을 봤을 때 CG와 블루스크린이 있잖아요. 영화는 많은 사람들 협업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반해 마술은 개인주의에요. 마술사만이 할 수 있는 미지의 힘, 그런 것들이 위주가 되고 특수함 위해 버리지 못한 지난 역사 때문에 사랑은 독차지 받았지만 예술로서 진보하지 못했죠. 제가 느끼기에 현시대는 변화하는 시점이에요.”
때문에 보이는 것을 기록한 뤼미에르 형제에서, 조르주멜리에스가 편집과정을 통해 새로운 면모를 내보인 것처럼, 이은결을 마술을 뛰어넘어, 그것을 가공하고 편집해, 눈앞에서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관객들에게 살며시 건넨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EG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말이다.
“마술을 매직콘서트로 바꾸면서 공연을 한 10년이 있었고. 패러다임의 한계, 현상 위주의 공연이 ‘디 일루션’(THE ILLUSION)을 만들게 된 것이에요. 마술이라는 것의 확장이고 일루션이라는 개념. 그 개념을 보여주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어요. ‘멜리에스 일루션’은 제가 하고 싶은 주제의식이 담긴 작품이에요. 솔직히 마술에는 주제를 담기 힘들어요. 쇼 리듬에 맞춰있기 때문이죠. 제가 마술을 시작하고 10주년 됐을 때, 철학을 담을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마술사 입장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얘기’ 말이죠.”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자 했는데 일루셔니스트 이은결이 아닌 작가 EG로 굳이 나선 데도 고민이 역력하게 묻어났다.
“아마 해외에서 했다면 저라는 정보가 없어서, 기대가 낮을 텐데. 저를 아는 분이 ‘멜리에스 일루션’을 봤다면 마술로서의 평가가 더 많을 거예요. 억지로 제 이름을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고, 작품을 저라는 사람의 테두리 안에 담지 않았으면 한 것이죠. 작품은 독립적으로 살아있는 거예요. 이제 막 태어난 아이 같은 존재죠. 저와 같은 몸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길 바랐어요.”
이은결의 작가로서의 고민은 또 다른 장르를 탄생시킨 셈이다. 또. ‘멜리에스 일루션’은 이은결이 아니면 해낼 수도, 해석할 수도 없는 무대다. 어떻게 이 같은 엉뚱하면서도 재밌고, 상상할 수 없는 무대를 눈앞에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걸까.
“마술은 갇혀있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관객과의 약속, 합당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내 숙제였어요.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마술을 즐기려고, 대리만족을 하고, 문화생활로서 해소하는 무대를 생각하는데, 그곳에 제 생각을 얘기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죠.”
“퍼포먼스 보다는 창작자로서 관객들에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이후로는 제가 아니라도 작품이 될 수 있는 무대요. 제가 초연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제가 아닌 다른 분이 오를 수 있는 무대가 될 수 있어요. 보여주고 싶은 것을 많이 보여주고, 말도 하고. 마술사 입장이 아니라, 작가의 입장이었던 것 같아요. 이 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주제, 내가 바라보는 관점. 디렉션 등 ‘멜리스 일루션’은 작가주의 작품이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은 아니에요. 무언가를 보여주는 작품보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길 전하고 싶은 거죠. 구상할 때부터, 제가 가진 쇼 패러다임은 이미 있는 형식 방법이기 때문에 어떤 웰메이드 이상으로는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에서 없는 공연’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 니즈가 모인 작품인 셈이죠.”
그렇다면 ‘멜리에스 일루션’을 통해 이은결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알아볼 수 없는 얼굴로 말도 한마디 하지 않고서도 관객들을 매료시킬 힘은 분명 있었다. 이는 앞으로 ‘멜리에스 일루션’을 기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멜리에스 일루션’은 처음에는 긴장이 있지만 언제부턴가 생동감이 넘쳐요. 초반에는 멜리에스의 모습이 슬픔, 절망, 분노가 분위기가 느껴지잖아요. 그린 것을 찢고, 후반에 그런 같은 행동이 이어지는데 처음과 다르게 느껴지게 되죠. 영화는 시간 예술이에요. 무조건 시간을 편집해서 만드는 예술이죠. 뤼미에르 형제가 기록을 하고, 조르주멜리에스는 조작을 한 것인데, 영화는 시간에 존속될 수밖에 벗는 한계가 있어요. 그런 한계성을 멜리에스처럼, 마술은 진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언어이고, 특수효과인 셈이니까요. 현실을 뛰어넘는 공간성과 시간성이 생기는 데, 이를 특수효과로 극복해내는 것이죠. 가상의 픽션이 현실의 불가능한 것을 아이러니하게 벗어나게 해주고, 그 픽션 때문에 현실이 맞아떨어지고 얘기가 되는 거예요. 비현실성이 가상에서는 통하는 구조, 즉 역 구조가 될 수도 있어요.”
김진선 기자 amabile1441@mkculture.com/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