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다양한 영화가 나왔으면 했고, 관객들에겐 한국이 참 아름다운 나라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지. 꼭 우리가 되짚어봐야 할 인물의 이야기잖아. 온 가족이 함께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어야겠다 싶었고. 한국에서 사는 게 불행하지 않다고도 말해주고 싶고.”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공공의 적’ ‘실미도’ ‘이끼’ 등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히트작을 냈지만, 감독으로 제작자로 너무 오랜 시간을 영화에 몰두해오던 터라 한동안 이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는 강우석 감독. 그러나 스무번 째 작품인 ‘고산자 : 대동여지도(이하 고산자)’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단다.
8일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강우석 감독은 “숫자(20번째)에 의미를 두진 않는데, 하도 주변에서 그런 얘길 많이 해서 ‘진짜 뭔가 의미 있는 작품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던 찰나 만난 작품이 ‘고산자’”라며 허허 웃었다.
영화 ‘고산자’는 한국 고지도 중 가장 크고 정확한,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삶을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기반으로 재구성 했다. 감독은 백성이라면 누구나 지도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목판 제작에 힘을 기울였던, 김정호의 뜨거운 애민정신에 초점을 맞췄다.
강 감독은 가뜩이나 영화를 찍기 싫었던, 한창 허하고 혼란했던 시기에 ‘고산자’에게 마음을 뺏겼다. 왜일까.
역사 왜곡 논란 등 각종 리스크에도 불구,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물으니 “그 위대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도, 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김정호 선생에 대한 기록은 없잖아. 필요한 결과물만 취하고 정작 이를 피땀으로 만든 인물에 대한 고마움은 없는 거지. 그게 화가 나더라고”라고 한다.
강 감독은 “사극이라고 하면 대부분 왕이나 높은 관직의 인물들 간 암투를 그리는데 서민 영웅도 분명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되짚어봐야 할 역사적 인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자극적인 장면으로 관람 등급이 높아지면 정작 가장 보여주고 싶은 관객인 아이들이 볼 수 없잖아. 그래서 잔인한 장면대신 전국 팔도의 절경을 담았고, 인물의 성품을 서글서글하게 설정해 코믹 요소를 넣었고, 화려한 장치 없이 인물의 정신에만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이상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이 얼마나 험난한가. 사실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을 텐데… 대체 이 양반은 35년이나 되는 세월을 대동여지도에만 몰두했을 지 계속 궁금했지. 진짜 이유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의 사상을 분석해 놓은 논문들을 찾아보면, 애민 정신이 강했고 의지와 뜻이 정말 확실했던 분이라더군.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것 자체가 숭고한 작업이었어.”
색다른 도전이었고, 뿌듯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될수록 뿌듯함 그 이상의 숭고한 정신과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특히 문화재청에서 관리 중인 대동여지도 목판을 직접 눈을 봤을 땐 경이로움을 넘어 ‘나는 언제 이토록 미친 듯이 몰입해 영화를 찍어본 적이 있던가’ 하는 자기 반성도 하게 됐다.
한 컷 한 컷에 완벽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 배우들로부터 ‘강우석 감독이 곧 김정호였다’는 평을 들은 것도 모두 이 덕분이었다.
“굉장히 진지하고 무거운 역사물을 기대한 관객들에겐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겠지. 하지만 편안하게, 유쾌하게, 지루하지 않게 담아야 모두가 볼 수 있지 않겠어? 그게 내가 추구하는 영화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데 자극적인 것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심심할 수도 있겠지만 내 뚝심대로 만들었고, 그래서 후회는 없소만!”
끝으로 ‘고산자’ 이후 영화에 대한 애정 지수를 물으니, “다시 뜨거워졌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다시 아이로 아니 초심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더 유쾌하고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 빨리 웃음 가득한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웃었다.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봐 줄지는 모르지만, 내가 담고 싶은 그림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풀어냈으니 됐지. 관객 댓글을 보니 ‘코미디로 풀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뜻밖의 재미’ ‘예술 영화인 줄 알았는데 가족영화라’는 반응이 많더라고. 어찌나 기분 좋고 행복 하던지. 개봉을 앞두고 김정호 동상을 찾아 ‘제가 당신을 꺼냈습니다’라고 수없이 마음속으로 되뇌었어. 숙연하게 찍었지만 많은 분들은 즐겁게 웃으면서 그분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네.”
‘고산자’는 시대, 권력에 맞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동여지도를 탄생시킨 지도꾼 김정호의 감춰진
8개월에 걸친 촬영 기간 동안 대한민국 곳곳의 절경을 담아내 아름다운 풍경과 온 가족이 웃으며 관람 가능한 편안한 매력이 강점이다. 지난 7일 개봉해 첫날 약 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129분.
사진 유용석 기자/ kiki2022@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