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피 매뉴얼이요? 그런 건 없습니다" "대통령님은 판단 능력을 상실하셨어요." "현재 구조 작업이 수월하게 진행 중입니다.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잠시 후) 죄송합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마땅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고작 몇만명 살리자고 대한민국 전체를 혼란에 빠트릴 생각이십니까?"
“사고는 지들이 쳐놓고 왜 국민들보고 수습하라고 해! 미친 것들....” <판도라> 대사 中
시작은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였지만 절망 속에서 침몰하는 지옥문을 스스로 연 건 인간이었고, 예고된 인재였다.
무능한 것으로도 모자라 국민의 소중함 나아가 생명의 존엄성마저 망각한 정부, "죄송하다"는 말 뿐인 대통령과 구멍 뚫린 안전, 그리고 허술한 시스템. 여기에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공무원들과 무너진 질서에 결국 아수라판이 되어버린 대한민국.
만약 지금 우리나라에 (자연재해든 원전이든 전쟁이든) 예상치 못한 재앙이 닥친다면 딱 이같은 꼴에 직면할 테다. 현실 자체를 옮겨 놓은 듯한 리얼함 때문인지 이 영화는 영화가 아닌 듯 했다. '판도라'는 필연적으로 올해의 문제작이 될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다.
29일 오후 왕십리CGV에서 국내 최초의 원전 재난 블록버스터 ‘판도라’(박정우 감독)기 베일을 벗었다. 영화 부문 크라우드 펀딩 사상 최고액인 7억 가량이 모여 제작 전부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영화는 동남권 한 원전을 배경으로 한다. 원전 외에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이 작은 도시에서 어느 날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준다는, 정부는 "꺼지지 않는 불"로 추앙하며 원전의 무분별한 확장을 추진하지만, (영화 속 원전의) 실상은 제대로된 관리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위험 덩어리다.
부실한 관리 끝에 결국 예견된 문제는 터져버리고, 정부를 비롯한 관련 책임자들은 사건 초기 단계부터 입막음에 급급하다. 작은 피해로 끝날 수 있던 사고는 사방에 만연해있는 무책임자들로 인해 총체적인 난국에 직면한다. 결국 위기에 내몰리는 건 국민이다.
사실 따져보면 '판도라'가 여타의 재난 영화보다 새로운 건 ‘원전 재난’이라는 소재 뿐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컨트롤타워, 각계 계층의 이기적인 책임자들, 이 안에서 스스로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소시민 영웅들, 가족애와 인간애를 다룬 메시지 등은 모두 익숙한 요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 영화 곳곳의 인물과 상황들이 공포스럽고 더 섬뜩하게 다가 오는 건 현 시국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타이밍 때문이다.
'최순실 국정 농단'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이 시점에 무능한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영화라니, 그 어떤 영화적 장치보다 드라마틱하게 다가올 수밖에. 때문에 '판도라' 속 서사는 그 어떤 공포물보다 섬뜩하고 그 어떤 풍자극보다도 신랄하게 다가온다.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는 대통령과 그를 꼭두각시로 여기며 사고 은폐에만 열을 올리는 실세 국무총리. 시민들의 안전과 목숨엔 아무 관심없는 책임자들과 TV를 보며 "개소리 하고 있네!"라며 분노하는 시민들.
영화는 분통터지는 현실, 처절한 상황을 그려나가면서도 결국 가족애, 인간애 등의 보편적 가치를 희망의 메시지로 담고 있다. 하지만 그 교훈에 완전히 젖어버리기도 전에 관객들은 피로감에 지쳐버릴수도 있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 일어 났던 비극들의 수많은 장면들을 떠올리며 136분 내내 울고 분노하다 보면, 어느새 진이 빠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경향도 있다. 완급 조절의 실패다.
게다가 영화 전체를 감싸는 건 '적날한 리얼리티'지만 그 결말과 해결책은 너무 이상적이고 진부하다. 그래서 허무한 감도 없지 않다.
분명 감독의 무거운 책임감과 용기, 배우들의 열정 속에서 탄생한 의미 깊은 작품이긴 하나 영화 자체만의 매력으로 따지면 아쉬움은 남는다.
김남길, 정진영, 문정희, 김영애 등 실력파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지만 대통령 역으로 특별출연한 김명민의 잔상만 오래도록 남는다. 이 역시 현 시국과 맞물리는 다양한 지점들 때문일 뿐, 캐릭터의 특별함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내달 7일 개봉. 12세 관람가. 러닝타임 1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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