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친절한 설명에도 지루하고도 어딘가 개운치가 못한 반면, 가벼운 듯 투박한 표현에도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니 꽤나 흥미롭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다.
대중은 몰라도 ‘칸’은 사랑하는 남자, 홍상수 감독의 화제작 ‘클레어의 카메라’가 국내 언론을 통해 베일을 가운데 (김민희와의) 사생활을 떠나 역시 거장은 거장이었다.
화려한 명성만큼 홍 감독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영화들을 여전히 심심찮게 나오고 있는 가운데 그의 제자 격인 이광국 감독의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이 지난 12일 뜨거운 관심 속에서 먼저 관객들을 만났다.
2005년 ‘극장전’부터 2006년 ‘해변의 여인’, 2008년 ‘잘 알지도 못하면서’, 2010년 ‘하하하’까지 홍 감독의 조감독으로 활동했던 이광국 감독은 전수받은 노하우를 백분 살려, 고현정 이진욱이라는 화려한 라인업까지 보태 작품을 내놨지만 공개 후 반응은 엇갈렸다.
두 남녀 주인공의 호흡, 개개인의 연기력은 뛰어났지만 감독은 진지한 메세지를 맛깔스럽게 혹은 자연스럽게 혹은 멋스럽게도 풀어내지 못했다.
동물원에서 호랑이가 탈출하던 어느 겨울의 어느 날, 여자 친구 집에 얹혀살던 경유는 하루 아침에 집에서 쫓겨난 채 대리 운전 아르바이트에 매진하지만 꼬인 인생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안 보인다.
그러던 중 그토록 꿈꿨던 소설가가 되어 있는 옛 연인 유정(고현정)과 재회하고 다시금 용기를 내 유정에게서 위안을 얻고자 하지만, 벗어나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아니 오히려 더 망가져 있는 그녀의 모습에 도망치고야 만다. 유정 역시 경유를 통해 내면의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지만, 결국 해답은 스스로에게 있을 뿐이다.
유정과 경유의 이야기는 달콤 쌉싸름한 현실 연애라기 보단, 옛 꿈을 상기시키는 추억의 상징물이자 서로의 비겁한 모습을 비춰주는 자아의 거울, 그리고 삶의 외로움을 달래고픈 본능적인 욕구가 녹아든 창구와도 같다. 단순한 듯 보이지만 복잡하고, 익숙한 듯 껄끄러운 입체적이고도 섬세한, 반가운 듯 마냥 반갑지만 않은 무서운 손님.
이진욱과 고현정은 각각 두 인물을 각자의 스타일에 맞게 물 흐르듯이 연기한다. 두 사람의 호흡은 기대 이상이지만 이것만으로 작품의 전체를 극찬하기는 힘들다.
홍상수인듯 홍상수와는 다른 대사와 유머는 어딘가 어설프고 에피소드들은 작위적이다. 소소하고 일상적인 멋을 느끼기엔 과도하게 멋부림을 했고, 세련된 비유나 인상적인 대사‧장면도 없다. 제목에서 사용한 ‘호랑이’의 쓰임 역시 일차원적이다. 무엇보다 아쉬움의 절정은 엔딩에서 제대로 터진다.
반면 홍상수 감독의 ‘클레어의 카메라’는 무심한 듯 투박하게, 경쾌한 이야기로 그려지지만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에 집중하냐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
사진 찍기를 즐기는 클레어(이자벨 위페르)는 누군가 자신의 사진에 찍히고 나면 그 사람은 어떻게든 변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에 찍히는 순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
지난해 칸에서 촬영, 1년 후 칸에서 공개된 뒤 (현지에서) 극찬 사례를 받은 작품은 러닝타임이 한 시간을 조금 넘는 69분의 소소한 소동극과도 같다.
영문을 몰라 답답하던 만희는 이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양혜의 오랜 동료이자 연인인 영화감독 완수(정진영)와 술김에 보낸 하룻밤 때문이다.
영화는 언뜻 한 남성을 둘러싼 두 여성의 치정극 냄새가 나지만, 몇몇의 장면에서 홍 감독의 김민희에 대한 넘치는 애정과 아름다운 찬사가 짙게 묻어나긴 하지만, 두 사람의 사생활을 조금 걷어낸 채 주목해 보면 ‘설정’은 소재일 뿐 메시지의 해석은 보다 다양해지고 넓어진다.
우연의 연속인 이들의 칸 일정 속에서 각 인물을 연결하는 외부인 클레어(이자벨 위페르). 파리 출신 교사인 그녀는 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그 와중에 만희를 만난다. 그녀를 해고한 대표 양혜, 완수와도 대화를 나눈다.
클레어에게 세 사람 모두는 이방인이지만 그녀가 가장 깊이 교감하는 상대는 만희다. 하룻밤 실수는 별거 아니라고 쿨한 척 말하지만 뒤로는 하루 아침에 보석이라 부르던 만희를 해고하고 질투를 숨긴 채 부정직을 논하는 양혜는 이상하고, 스스로 ‘꼴이 우습다’고 말하는 완수는 낮부터 만취해있는 주정뱅이다.
하지만 클레어의 눈에 만희는 아름답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다. 서로의 예술혼에 대해 존중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스스럼없이 그것을 나눈다. 한국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는 그녀에게 선뜻 음식을 대접하고, 현재의 고민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양혜에게만은 질투의 대상이지만 그것이 곧 만희 자체는 아니다. 만희를 찍고, 그녀를 천천히 살펴 본 클리어가 내린 결론은 전혀 다르다.
만희와 클레어의 우정은 중동석이 있다. 볼수록 빠져들고 이는 두 여배우의 기막힌 호흡 덕분이다.
외국에서 우연히 마주친 만남에서 어색한 듯 편안하게 깊숙이 소통하고 교감하는 이들의 모습은 순수 그 자체. 인간관계에서 말하는 ‘깊이’에 대한 모순과 선입견을 뒤집어 놓으며 아무것도 아닌 만남들과 우연, 소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유난히 흥미롭게, 가치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순수함과 거짓에 대한 희극을, 불안전성과 짧은 만남 그리고 우연의 연속이 빚어내는 마법 같은 삶의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클레어가 찍은 다양한 사진들의 향연은 삶의 모든 가능성의 포착이며 자기성찰과 반성을 가능케 한다.
관객이 직접 현장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훔쳐보는 듯, 홍 감독 특유의 카메라 워크나 주변 소음까지 그대로 날것으로 담아내는 꾸밈없는 촬영 기법은 이번에도 변함이 없다. 어색한 듯 보다보면 듣다보면 중독되는 대사들과 소소한 유머
다만 홍 감독의 전작에 비해 여운의 깊이는 다소 얕다. 홍 감독과 김민희의 사생활을 절로 잊게 할 정도의 킬링 포인트가 없다는 점, 모든 구설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천천히 살펴보고 세밀하게 뜯어볼 애정이 국내 관객들에게 남아 있진 않다는 게 가장 아쉬운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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