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부끄러워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썼어요. 꼭 위안부 영화라고 규정짓기보다 법정 여성 영화로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민규동 감독”
영화 ’허스토리’의 감독 민규동은 작품이 공개된 뒤 이 같이 말했다. 작품 곳곳에서 느껴진 그의 진심에 절로 숙연해졌고 덩달아 부끄러워졌다.
민규동 감독은 지난 7일 서울 광진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10년 전부터 위안부를 다룬 영화를 만들려 했지만 몇번이나 좌절했다"고 운을 뗐다.
민 감독은 “1990년대 초반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최초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고백을 보고 돌멩이를 얹은 채 살았다. 10년 전부터 영화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힘들고 불편한 이야기를 누가 보겠냐고 해서 좌절했다"며 "그러다 도저히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부끄러워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다고 생각해 시나리오를 썼다”고 고백했다.
이어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 전혀 몰랐던 관부재판 이야기를 알게 됐다. 이 작은 승리의 기록이 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더라"라며 "그리고 이 작은 승리 안에 큰 서사가 있다고 생각해 과감히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했다.
영화는 1990년대 부산의 일본군 위안부·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일본 정부와의 벌인 법정 투쟁을 그린 영화다. 시모노세키와 부산의 지명 하나씩 따 ‘관부재판’이라 불렸다.
민 감독은 "’왜 하필 이 영화인가?’라는 질문을 늘 받는다"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게 부끄러웠다. 늘 빚진 마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우리 영화에서도 그런 대사가 있다.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느냐?’라는 대사가 있는데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우리가 아는 것만으로 세상은 이미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고 진심을 전했다.
위안부 피해자 배정길 할머니를 맡은 배우 김해숙은 “연기하면 할수록 그분들이 아픔의 깊이를 0.001%도 알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럽고 힘들었다”며 “많은 분들이 영화를 보셔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관부재판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알아가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픔과 상처를 딛고 뜨거운 열정으로 일본에 맞선 그분들의 뜨거운 용기를 함께 나눠주셨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관부 재판을 이끄는 원고단의 단장 문정숙 역을 맡은 김희애는 "처음에는 일본어만 걱정했는데, 부산 사투리가 오히려 압박으로 돌아왔다. 어미 처리만 신경 쓰면 될 줄 알았는데, 한 문장에도 억양이 다 있더라"라며 "전 괜찮은데 부산 분들은 절대 아니라고 해서 자면서도 들었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어쩌면 보통의 스토리였다면 ’이만하면 됐다’고 포기했을텐데, 할머니들 생각하면 가짜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문숙은 "차마 밝히지 못할 어려운 일을 당하고도 앞으로 나왔다는 것에 할머니들께 찬사를 보내고 싶다. 사람들의 욕을 먹어가면서 앞으로 나온다는 건 정말 가슴 떨리는 일이다"며 "할머니들이 대한민국 여성을 대표해서 큰 소리로 외쳐주셨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잊지 않겠다. 계속 해서 소리를 내고 계속해서 열심히 살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이용녀 역시 "내 역할은 현실에서 위안부 문제를 잊고 살듯이 순간순간만 생각나는 아픔만 느끼는 역할이라 마음이 일부분 편했다"며 "평소 강해 보여서 이런 역할을 맡기 힘든데 감독님이 과감하게 좋은 역할 주셔서 좋은 배우들과 작업해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작품을 통해 다음 세대에는 이 문제가 또 다시 이야기 나오지 않도록 해결의 바람을 일으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 속 ’이제라도 미안하다 잘못했다 한마디 해다오’라는 대사처럼 꼭 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관부 재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보상 판결을 받아냈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을 발칵 뒤집을 만큼 유의미한 결과를 이룬 재판이지만 지금껏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 속에서 잊혀져왔다.
1990년대 후반 당시 동남아 11개국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재판 소송 중이었으나, 유일하게 관부 재판만이 일부 승소를 거두고 국가적 배상을 최초로 인정받았던 귀중한 재판이라는 점에서 의
우리가 마땅히 기억해야 할 역사이며,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 그리고 우릴 변화시킬 이야기를 담은 ’허스토리’는 오는 27일 개봉한다.
사진 유용석 기자/ kiki2022@mk.co.kr[ⓒ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