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덕환은 ‘미스 함무라비’에서 정보왕 판사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공ㅣ씨엘엔컴퍼니 |
배우 류덕환(31)에게 ‘미스 함무라비’는 ‘변화’와 ‘자신감’이었다. 전역 후 첫 작품, “제대 후가 아니었다면 선택하지 못할” 드라마였다.
“20대 땐 무조건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어요. 대중을 아예 배제한 거죠. 그런데 군생활 하면서 ‘전역하고 TV에서 만나면 반가울 것 같다’는 군대 후임의 말이 제 마음을 움직였죠. 이젠 대중의 심리나 원하는 걸 조금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분량만 생각한다면 많은 작품을 놓쳤을 겁니다. 무엇보다 TV에 나오니 가족 친척들이 좋아하더라고요. 그것도 매주 연속으로 나오니까.(웃음)”
최근 종영한 JTBC 월화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는 현실에 발을 붙인 에피소드로 매회 시청자를 만났다. 현직 판사가 쓴 작품답게 사람에 집중하는 법정 드라마로 큰 울림과 공감을 줬다. 직장 내 성희롱, 가정폭력 등 실제로 겪을 법한 현실적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삶의 얼굴을 보여줬다.
그는 법원을 휘젓고 다니는 ‘걸어 다니는 안테나’ 정보왕으로 존재감을 보여줬다. 법원 내 최고 정보왕이자 오지랖 대마왕, 음주와 가무에 능하면서 일도 잘하는 다재다능 캐릭터였다.
재판 현장을 제외한 대부분 장면엔 특유의 애드리브가 발현됐다. 그는 “명색이 판사인데 액션배우로 캐스팅 된 게 아닌가 헷갈릴 정도였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제겐 의미있는 캐릭터입니다. 감독님이 뛰고 구르는 걸 더 좋아하시간 했지만요.(웃음) 사람 좋아하고 오지랖 넓고 사회생활도 잘하려고 하고 피해 안 끼치려 하는 정보왕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어요. 이 역할을 하면서 사람을 둘러볼 수 있게 됐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을 조금 더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인간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았죠.”
판사 역을 맡았지만 정작 법정에 서는 장면은 거의 없었다. 로맨스를 더 많이 보여줘야 했던 작품. “작가님한테 컨플레인 넣을 거다”며 웃던 그는 “아쉽지만 한편으론 다행일 수도 있다. 바른(김명수 분)이처럼 뭔가 멋있는 것 했으면 이질적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이엘리야와의 러브라인은 ‘보도커플’로 사랑받으며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전개에 유쾌한 활력을 줬다.
“덜그덕 거리는 것도 없고 눈치 봤던 것도 없었죠. 가장 좋았던 건 그 친구가 본인이 선택한 것에 대한 신뢰감이 크다는 것,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안다는 거였어요. 이 친구의 확고한 캐릭터에 내가 동화돼 섞이려 하지 않고 잘 듣고 잘 받아들이고 잘 반응해야겠다 싶더라고요.”
반 이상이 사전제작이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다. 시청률에 촬영장 분위기가 좌지우지 될 필요도 없었다. 류덕환은 “안 그래도 혼자 미친 놈처럼 시청률에 무덤덤한 편인데, 이번엔 촬영장 분위기가 좋아 웃고다녀도 괜찮았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원래 모니터링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배우다.
“그게요, (모니터링을) 하게 되면 자꾸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내가 한 것에 대해 후회 안하려는 게 있어요. 23살 때 영화 ‘우리 동네’ 촬영을 하면서 모니터링을 하는데, 옷이 구겨진 게 계속 신경 쓰이더군요. 그걸 보는 내가 어이없었죠. 감독도 못 믿고 의상팀도 못 믿고 ‘그럼, 내가 모니터링 하는 이유가 뭐지?’ 싶더군요. 그때부터 모니터링 안 하는 습관을 갖게 됐어요. ‘미스 함무라비’ 본방도 못 봤어요. 인터뷰 기사도 안 봅니다. 알아서 잘 써주실 거라고 믿거든요. 하하.”
류덕환은 촬영을 하지 않을 때도 바쁘다. 그에게 세상 사는 모든 게 아이템이다. 지난 일을 곱씹으며 속앓이 할 시간에 “영화를 보거나 시나리오를 쓰거나 단편영화 작업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요즘엔 “넷플릭스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 연기도 하고 연출도 하는 류덕환은 요즘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제공ㅣ씨엘엔컴퍼니 |
“‘지구를 지켜라’는 제가 본 영화 중 1등으로 꼽는 건데 감독님이 그 영화 이후 ‘화이’ 만들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작품을 못했잖아요. 궁금해서 쓰게 된 작품이에요. 맨 마지막에 감독님이 출연해주셨는데 배우 욕심이 많으세요.(웃음) 스카프 8개를 준비해오셨는데 ‘뭐가 더 낫냐’ 물으셔서 안 하는 게 낫다 말씀드렸더니 딱 3초간 실망하시더군요. 감독님의 아~주 어색한 연기가 맘에 들어요.”
연출의 세계를 잘 아는 배우, 작품 보는 눈도 다르지 않을까. 류덕환은 고개를 흔들며 “저는 ‘천하장사 마돈나’(이해영 이해준 감독)가 천만 들 줄 알았다니까요”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단순히 관객이 몇 백만 들고 시청률 몇 십 프로가 나오는 기준은 모르겠어요. 작품 보는 기준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겁은 좀 없어진 것 같고요. 용기가 좀 생겼달까요. 예전엔 돌다리도 두들겨 봤는데....”
최근엔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많이 쓰고 있다고 한다. “여성은 남성과 완벽히 다른 인물이라서 가장 궁금한 사람이었다”는 것.
“스물 일곱 살부터 40대 후반까지 여성이 이러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바라봤던 멋진 여성들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내가 만든 주인공들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시작하는 시나리오들이에요. 제 얘기를 쓸려고 하니 인생을 참 재미없게 살았더라고요. 에피소드들이라고 해봐야 술 마시고 다음 날 잊어버린 일들밖에 없더군요. 그러다보니 연출 하면서 주변의 이야기, 한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예요. 이런 작업들이 배우로서 제게 엄청난 도움이 돼요. 평소 지하철, 버스, 택시 등을 타고 다니면서 많이 관찰하고 아이템을 얻어요. 주변에 널린 것들이 다들 아이템이라서 너무 재밌는 거예요.”
이제 서른을 갓 넘겼는데 벌써 27년차 배우다. 1992년 MBC ‘뽀뽀뽀’ 아역으로 데뷔해 2006년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로 주목받기까지 그는 충무로가 주목하는 배우였다. 작은 키에 괴물급 연기력을 갖고 있는 그에게 천재 배우란 애칭도 달렸다. 2010년부터 시즌4까지 이끌었던 OCN ‘신의 퀴즈’ 시리즈는 그의 저력을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스크린과 TV, 연극무대를 오가며 중견배우 못잖은 필모그래피를 쌓았고, 특히 6년간 한 작품(‘신의 퀴즈’)을 찍으며 20대의 절반을 보냈다.
그의 모험적이지만 고집스런 행보 뒤엔 어머니의 소리 없는 가르침이 있었다.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어머니처럼 마음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단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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