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에서 휴대폰으로, 다시 스마트폰으로. 삐삐는 10여년 전만해도 길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허리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90년대 대학풍경을 담은 영화 <건축학개론>에나 등장하는 ‘추억의 산물’이 되고 말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톡톡톡, 두드리기만 하면 열리는 새로운 세상. 차갑고 딱딱한 기계에 기대는 세상. 메마른 세상에 허기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특별한’ 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마음을 쏟을 무언가를 말이다. 대한민국을 마음의 수렁에 빠뜨린 ‘중독’을 주제로 기사를 연재한다.<편집자주>
<사례1>미혼 직장인 김 모 씨(32)는 오후가 되면 퇴근하고 곧장 집으로 달려간다. 모임이나 회식은 핑계로 빠지고 김 씨가 집으로 향해서 하는 일은 컴퓨터를 키고 음란물을 즐기는 것이다.
수년 전부터 혼자 살고 있는 김 씨는 처음에는 호기심에 음란물을 접했지만, 이후 중독돼 하루에도 몇 시간씩 음란물을 보게 됐다. 음란물은 웹하드나 P2P 사이트를 통해서 구하고 있다. 이런 생활을 지속해온 김 씨는 정상적인 연애는 물론, 속을 털어놓은 친구도 하나 없다. 그럴수록 김 씨에게 음란물은 위안거리로 느껴졌고, 중독 현상을 심해졌다.
<사례2>청소년 때부터 음란물을 경험해 온 대학생 이 모 씨(25)는 매 주 마다 치장을 하고 강남의 모 클럽을 찾는다. 이 씨가 클럽을 매주 가는 이유는 다름 아닌 소위 ‘원나잇’을 즐길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클럽에서는 적당히 오른 취기와 환상적인 분위기로 적지 않은 수고를 들이고도 쉽게 여성들을 유혹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이 씨는 주말만 되면 친구들과 클럽을 찾았고, 다음 날에는 하루 종일 잠을 자거나 숙취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지만 이 씨가 클럽을 자주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를 받았다.
최근 음란물 산업이 발달하고, 또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의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돼 음란물 중독에 빠지는 성인들이 늘고 있다. 또 음란물 중독에 빠져 이를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성인들이 늘면서 성에 탐닉하는 인구가 증가하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충청북도의 7개 고등학교 재학생 153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음란물을 매일 3시간 이상 본다는 학생 중 47.6%는 강제 키스나 애무를, 35.7%는 강간이나 준강간에 해당하는 행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반면 음란물을 매일 ‘30분 이내로 보거나 전혀 보지 않는다’고 답한 학생의 성범죄 비율은 2.9%였다.
음란물 중독은 보통 단순한 성적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음란물을 접하는 빈도가 높아져 점점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서 손쉽게 음란물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이 같은 음란물 중독이 가속화되고 있다.
음란물 중독은 섹스 중독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음란물을 통해 얻은 성적 판타지를 실천하고자 하는 욕망과 또 음란물보다 더욱 강한 자극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섹스를 탐닉하게 되되는 것이다.
하지현 건국대학교병원 교수(정신과)는 “음란물이 가지고 있는 공격성이라던 지, 변태적인 성욕적인 측면 등에서 음란물에 중독될수록 점점 더 강한 성적 환상을 추구하게 된다”며 “쾌감을 반복적으로 얻고자 노력하다가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되고, 그러다가 성매매나 위험한 성관계, 원나잇 스탠드를 탐닉하게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음란물 중독이 갖는 폐해는 크게 △일상생활의 지장 △성적 판타지의 실현 욕구 △위법적인 행위의 위험성 증가 등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우선 음란물을 즐기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고, 정상적인 대인관계가 힘들어 진다. 또한 음란물을 통해서 접한 성적 판타지를 키우고 이를 실천에 옮기면서 섹스 중독 등과 같은 2차적인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몰카, 노출증, 소아성애와 같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행위에 집착할 위험성이 커진다.
우리나라 국민들 중 음란물 중독 인구는 약 5%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결코 적지 않은 음란물 중독 인구는 청소년들의 음란물 경험 빈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더욱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 청소년들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서 음란물을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2011 여성가족부가 청소년 유해 환경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중·고등학생의 54.5%가 온라인을 통해서 음란물을 경험했고, 또 처음으로 음란물을 경험하는 시기도 중학교 1학년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음란물 경험 비율은 지난 10년 보다 약 64% 정도 증가한 수치이다.
음란물은 어릴 때부터 자주 볼수록 더욱 위험하다.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을 해치고, 학력 저하, 주의력 결핍, 심야 시간 시청에 따른 만성 피로를 유발하기도 한다. 또 사춘기에 형성된 비뚤어진 성 관념이 성인까지 이어질 수 있어 문제의 심각성이 더하다.
음란물 중독도 다른 여타 중독과 마찬가지로 치료가 필요하다. 치료는 주로 인지행동치료나 약물
하 교수는 “음란물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통제력을 향상시키고,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며, 스스로 음란물 중독임을 자각하고, 치료 의지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며 “성적 충동을 음란물과 같은 방법이 아닌 건전한 방법으로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석영 매경헬스 [hansy@mkhealt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