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끝난 지 겨우 5개월이 지났건만, 앞으로 다가올 4년 6개월 뒤를 놓고 야권의 잠재적 대선 후보들이 서로 기 싸움을 시작한 듯합니다.
침묵을 깬 것은 문재인 민주당 의원입니다.
대선 패배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문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 4주기 행사를 시작으로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문 의원은 어제 서울 광장에서 열린 추모 문화제 자리에서 뼈 있는 얘기를 했습니다.
들어보시죠.
▶ 인터뷰 : 문재인 / 민주당 의원(5월19일)
- "앞으로 5년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준비하고 마음을 모아 5년 뒤에는 반드시 정권을 바꾸자."
5년 뒤에 반드시 정권을 바꾸자는 말의 의미는 뭘까요?
야권이 단결해 정권 교체를 이루자는 통상적 얘기일 수도 있지만, 문재인 의원이 그 정권교체의 선두에 설 수 있다는 뜻일까요?
지난 대선 패배로 재도전은 포기할 것 같았던 그의 마음을 다시 되돌린 것은 무엇일까요?
그 의지가 담긴 말을 더 들어보시죠.
▶ 인터뷰 : 문재인 / 민주당 의원(5월19일)
- "노무현 대통령님이 남기신 말씀이 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으로 민주주의 지키고 정치도 닦아야 한다. 제가 정치에 뛰어든 것도 이것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는데 여러분 성원에도 뜻을 이루지 못해서 국민께 송구스럽고 노무현 대통령께도 죄송스런 심정으로 4주기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 강물이 바다를 포기하지 않듯 노무현 대통령이 꿈꿨던 사람을 위한 세상을 위한 꿈은 놓칠 수 없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갈 운명을 스스로 거역할 수 없듯, 문재인 의원 역시 자신 앞에 놓인 운명을 스스로 거역하지 않겠다는 뜻일까요?
문재인 의원 관계자는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문재인 아니면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며 '그러나 필요하다면 미적거리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철수 의원을 포함해 누구에게든 할 말을 할 것'이라는 말도 들립니다.
문 의원이 보기에, 지난 대선 패배의 책임을 오로지 친노에만 씌우는 현 민주당도 틀렸고, 여야를 모두 비판하며 독자 세력을 도모하지만, 여전히 뜬구름에 있는 듯한 안철수 의원도 틀렸다고 판단한 것일까요?
문 의원은 '명망가 중심의 야권 재편은 성공하기 어렵고 정권 교체도 어렵다', '시민 참여를 확대하는 정치 모델로 가는 것이 민주당의 살길이고 새 정치'라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걸 보면 아마도 문 의원이 꿈꾸는 새 정치는 확실히 현 민주당 지도부나 안철수 의원이 꿈꾸는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안철수 의원의 독자 행보 노선은 점점 더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안철수 의원은 지난 주말 부산과 광주를 잇달아 방문해 여야 모두를 싸잡아 비판했습니다.
▶ 인터뷰 : 안철수 / 무소속 의원(5월18일)
- "광주정신은 시대의 슬픔을 넘어 대한민국 이정표를 세우는 커다란 좌표였지만, 지금 그 좌표가 흔들리고 있다. 관성에 젖고 기득권에 물든 기성정치가 광주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꽃을 피우기보다 오로지 열매와 과실을 향유하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
민주당의 심장부인 광주에서, 그것도 5.18 기념식을 찾은 자리에서 민주당에 선전포고를 한 셈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민주당에 입당하거나 연대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기도 했습니다.
안 의원의 말을 더 들어보죠.
▶ 인터뷰 : 안철수 / 무소속 의원
- "지난 대선 출마 이후 끊임없이 한쪽 편에 설 것을 요구받고 있다. 하지만, 진영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편 가르는 정치는 하지 않겠다. 요즘 갑을 관계 여러 가지 말 많다. 그런데 제가 병. 노원 병. 병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썰렁하죠? 하하."
갑을이 아닌 '병'이라고 하는 안 의원의 말은 10월 재보선을 나 홀로 치르겠다는 의지로 들리지 않나요?
안철수 의원의 이런 자신감은 지난 보궐선거 승리와 함께 광주의 민심이 자신에게 절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안 의원이 5.18 기념식 전야제에 참가했을 때 지지자들이 몰려들면서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안 의원으로서는 흥분할 수밖에 없고, 더는 호남의 맹주인 민주당에 의존할 필요도 없다고 느꼈을 법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안 의원은 이날 기념식에서 만난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살가운 인사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남남이라는 뜻입니다.
민주당과 안 의원은 이제 제각각 자기 갈 길을 가야 할 운명에 처한 걸까요?
반면, 문재인 의원은 민주당과 결별할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현 민주당 지도부가 친노 세력을 괄시하는 것이 기분 나쁘긴 하지만, 그래도 민주당은 하나라는 인식을 하는 듯합니다.
문 의원은 김한길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제에서 한 시민으로부터 제지를 당한 것과 관련해 '대신 사과하겠다며 마음에 담아두시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트위터에는 '김한길 대표의 행사장 방문을 막은 것은 크게 잘못한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다. 노무현의 가치는 연대'라고 썼습니다.
자, 이제 조금은 분명해졌습니다.
문재인 의원은 현 민주당의 방향이 잘못됐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을 버리지는 않겠다는 겁니다.
안철수 의원은 민주당이 기성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만큼 독자 노선을 가겠다는 겁니다.
문 의원과 안 의원은 다시 숙명처럼 제2라운드를 맞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물이 바다를 포기하지 않듯, 그들의 운명이 이처럼 정해진 것이라면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는 거겠죠.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