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정권 초기가 지나고, 이제야 비로소 실질적인 박근혜 정부가 시작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통상 새 정권이 들어서면 6개월은 과거 정권 지우기 작업이 본격화합니다.
과거 정권에서 있었던 각종 의혹과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고, 과거 정권에서 임명했던 사람들을 교체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있었던 일입니다.
박근혜 정부 역시 과거 정부들과 다르지 않을까요?
우연한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명박 정부 사람들이 줄줄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MB 정권 탄생의 일등공신이었던 이른바 6인방은 이제 그 존재 자체도 사람들 기억 너머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형님인 이상득 전 의원은 여전히 수감중이고,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은 사면 뒤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 김덕룡 전 의원도 간혹 모습을 보이지만 예전만큼 사람들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 트위터를 통해서 가끔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고 있지만, 그 역시 언론 접촉은 극히 피하고 있습니다.
6인방은 아니었지만, MB 정권의 핵심 실세 중 실세였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도 파멸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정보기관 수장으로는 처음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서는 치욕을 당했고, 어제 첫 공판에서는 검찰로부터 여론을 조작해 정치개입을 했다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어제 공판에서 나왔던 박형철 부장검사의 말입니다.
"피고인(원세훈 전 원장)은 그릇된 종북관에 따라 근거 없이 무차별적으로 야당 정치인에 대해 종북 딱지를 붙이는 신종 매카시즘 행태를 보였다"
검찰 쪽 주장을 들어보면, 원 전 원장은 "부서장들이 이명박 정권밖에 더하겠어요"라며 이명박 정부를 위해 충성하라고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또 "국민의 의사가 많이 반영된 게 여당이라며, 많은 국민이 원하는 쪽으로 일하는 게 맞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검찰은 이런 원 전 원장의 발언과 심리전단 운영을 지휘한 것을 볼 때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물론 원세훈 전 원장 측은 종북 대응은 국정원 고유업무라며 맞섰습니다.
원 전 원장 측 이동명 변호사의 말입니다.
"조폭이 사람을 칼로 찌르면 범죄이지만, 의사가 환자를 칼로 수술하는 건 범죄가 아니다. 검찰은 국가안전보장업무를 해온 국가정보원과 원 전 원장을 조폭처럼 취급하고 있다"
이제 공판이 시작됐으니 누구 말이 맞는지, 정말 원세훈 전 원장이 선거개입을 주도했는지 재판 결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 최고정보기관 수장이 국회 청문회에 서고, 재판장에 서는 모습은 엄청난 치욕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청문회에서 있었던 원 전 원장의 심정입니다.
▶ 인터뷰 : 정청래 / 민주당 국정조사 특위 간사(8월16일)
- "서울 구치소 생활하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 인터뷰 : 원세훈 / 전 국정원장
- "그 말은 지금 드리지 않겠습니다."
▶ 인터뷰 : 원세훈 / 전 국정원장
- "(잠 제대로 주무시나요?) 오래전부터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습니다. (못 자죠?)"
MB 맨이라 이름 붙이기는 뭐하지만, 어쨌든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했던 양건 감사원장도 불명예 퇴진했습니다.
이임사를 들어보겠습니다.
▶ 인터뷰 : 양건 / 전 감사원장(8월26일)
- "외풍을 막고 직무의 독립성을 한 단계나마 끌어올리려 안간힘 썼지만, 물러서는 마당에 돌아보니 역부족을 절감합니다."
외풍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청와대를 말하는 걸까요?
양 원장은 4대강 감사 번복과 인수위에서 일한 장 훈 감사위원 선임 문제를 놓고 청와대와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독립성이 생명인 감사원장이라 청와대도 양 원장을 유임시켰지만, 결국 정권 코드나 색깔이 달라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양 원장은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시종일관 침묵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왕 차관, 실세 중의 실세로 불렸던 박영준 전 차관 역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영포라인의 핵심으로 이명박 정부 초기 공공기관 인사를 좌우했던 박 전 차관은 어이없게도 원전 관련 로비 혐의로 오늘 검찰에 소환됐습니다.
박 전 차관은 이미 민간인 불법사찰과 서울 양재동 파이시티 인허가 청탁 명목으로 수감 중이었는데, 또 다른 죄목이 하나 더 붙은 셈입니다.
지난해 검찰 수사를 받던 당시 박 전 차관의 말입니다.
▶ 인터뷰 : 박영준 / 전 지식경제부차관(2012년 5월2일)
- "언론이 이국철 사건 때도 보면 너무 많이 사실과 다른 부분에 대해서…. 모든 사실 관계는 검찰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인터뷰 : 박영준 / 전 지식경제부 차관(5월3일)
- "(돈 받은 부분은 사실입니까? 시인하셨습니까?) 아니요. 들어갈 때와 입장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박 전 차관은 이번 원전비리 수사 때는 또 어떻게 말을 할까요?
이명박 정부 당시 총리실 국무차장에 이어 지식경제부 2차관으로 가면서 서울로 들어가는 남태령 고개는 절대 넘지 않겠다고 했던 박 전 차관.
결국, 먼 부산지검으로 또다시 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들 말고도 아직 주요 정부 산하기관과 공기업에는 이명박 정부에서 임명한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공공기관장 인사가 늦어지고 있긴 하지만, 이들 가운데 다수도 스스로 떠나거나 어쩌면 타의에 의해 사실상 쫓겨날 운명일 겁니다.
늘 우리가 보아왔던 모습이니까요.
MB맨들의 몰락은 역설적이지만, 박근혜 정부의 강력한 국정운영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제 비로소 박근혜 정부는 본격적으로 달려갈 준비를 끝낸 셈입니다.
그런데 혹 박근혜 정부 사람들도 정확히 5년 뒤, 그러니까 차기 정부가 들어서고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이명박 정부 사람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까 궁금해집니다.
수레바퀴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걸까요?
지금은 너무 먼 얘기이겠지만 말입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
영상편집 : 김희경 이민경 신민희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