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북한을 왕조국가에 비유하곤 합니다.
왕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듯이, 북한 역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 체제가 모든 권력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북한을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처럼 우리의 왕조국가에 비유하는 것은 부적절한 면도 있습니다.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역모에 대한 엄한 처벌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왕이 모든 것을 함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국문을 통해 죄에 대한 명백한 진위를 밝혀야 했고,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야 했고, 그리고 나서도 그 수위가 적절한 지에 대한 검토를 거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장성택의 실각을 다루는 김정은의 통치스타일은 그렇치 않은 것 같습니다.
정확히 장성택이 왜 실각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실각 자체가 매우 전격적이고 신속한 것이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북한은 어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장성택을 모든 직무에서 해임하고 당으로부터 출당, 제명키로 했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이 오늘 공식 발표한 내용을 보겠습니다.
"장성택 일당은 당의 통일 단결을 좀먹고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을 저해하는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를 감행하고 강성국가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투쟁에 막대한 해독을 끼치는 반국가적, 반인민적범죄행위를 저질렀다"
반국가적, 반인민적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니 도대체 장성택이 무슨 일을 저지른걸까요?
직무 해임은 물론이고 출당과 제명까지 한 걸보면 그 죄가 매우 크다는 의미일 겁니다.
형식적으로든 어쨌든 당이 이끄는 북한 체제 특성상 출당과 제명은 가장 큰 처벌일 겁니다.
가족관계라 처형은 면했지만, 김정은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을 내린 셈입니다.
'장성택 일당'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장성택 개인 뿐 아니라 그 측근들도 대거 숙청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도대체 장성택은 무슨 죄를 진 걸까요?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를 좀 더 보겠습니다.
"당의 방침을 공공연히 뒤집어엎던 나머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에 불복하는 반혁명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령에 불복하는 반혁명적 행위'라고 표현했습니다.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은 김정은을 뜻합니다.
그러나 김정은의 직책은 최고 사령관 말고도 많습니다.
노동당 제1비서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도 김정은의 직책입니다.
그런데 굳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는 군 직책으로 김정은의 직책을 명시한 것은 왜일까요?
아마도 장성택이 군부와 맞섰다는 것을 강조하려 한 듯합니다.
장성택은 북한의 개혁 개방을 주도하는 온건파로 분류됩니다.
이런 장성택이 남북 관계와 대외 관계를 강대강 국면으로 가져가려는 군부와 대립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난해 12월 장거리 로켓 발사와 지난 4~5월 개성공단 폐쇄, 그리고 최근의 4차 핵실험 등과 관련해 장성택과 북한 군부가 충돌했을 수 있습니다.
김정은을 등에 업고 북한 군부가 장성택을 밀어냈다면, 군총정치국장인 최룡해에게 급격히 힘이 쏠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최룡해가 조직과 세력면에서 장성택과 다툴 만큼 크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말입니다.
장성택 실각에 대한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내용을 또 보겠습니다.
"장성택 일당은 사법검찰, 인민보안기관에 대한 당적 지도를 약화시킴으로써 제도보위, 정책보위, 인민보위 사업에 엄중한 해독적 후과를 끼쳤다"
사법검찰과 인민보안기관에 대한 당적 지도를 약화시켰다는 의미는 뭘까요?
당 보위부와 조직지도부와 장성택이 충돌했다는 의미일까요?
장성택은 당 행정부장으로 리용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공개처형된 것을 보면 당 행정부와 조직지도부가 충돌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조연준 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과 민병적 부부장이 장성택 행정부장을 밀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당내 행정부와 조직지도부의 갈등이 있었을 법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비리 혐의입니다.
조선중앙통신의 보도입니다.
"장성택 일당은 교묘한 방법으로 나라의 경제발전과 인민생활향상에서 주요한 몫을 담당한 부문과 단위들을 걷어쥐고 내각을 비롯한 경제지도기관들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하자원을 싼값에 팔아먹었다."
장성택이 주요 경제적 실권을 쥐고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해 오늘 한 언론은 북한을 다녀온 중구기업인의 말을 빌어 평양에서 총격전이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장성택의 최측근인 장수길 행정부 부부장이 관리하는 한 회사에 북한 보위부 군인들이 쳐들어와 회사를 인수하러 왔다고 합니다.
"김정은 원수님의 지시를 받고회사를 인수하러 왔다."(보위부 군인들)
"여기가 어디인 줄 아느냐. 장성택 부위원장의 회사이다"(장성택 측근들)
곧이어 양측간의 총격전이 벌어졌고, 그 여파가 장성택 실각으로 이어졌다는 겁니다.
보도 내용의 사실 유무는 좀 더 확인해야 하지만, 장성택과 북한 군부가 경제적 실익을 놓고 충돌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장성택은 김정은 집권 이후 제3경제위원회를 통해 북한의 알짜배기 회사를 싹쓸이했다는 언론 보도도 있습니다.
제3경제위원회는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38호실'의 후신으로 각종 이권 사업체를 운영하며 김정은의 통치자금을 만드는 기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중앙통신도 장성택이 각종 경제적 이해관계와 비리에 연루됐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장성택 부위원장이 여성들과 부당한 관계, 해외도박장 출입 및 외화 사용, 마약 중독 등 자본주의 생활양식에 빠져 부정부패행위를 일삼았다."
조선중앙통신의 보도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장성택을 몰아내기 위해 누명을 씌웠을 수도 있으니까요.
1970년대부터 북한의 2인자로 지내왔고, 몇차례 쫓겨나기도 했던, 그래서 누구보다도 북한 권력체제에 대한 이해가 많던 장성택이 과연 이런 허술한 짓을 했을까 의구심도 듭니다.
장성택이 누명을 쓴 것이라면, 김정은은 왜 누명을 씌어서라도 장성택을 쫓아내야만 했던 걸까요?
장성택 실각의 진짜 이유가 무엇이든 김정은은 이제 싫든 좋든 나홀로 통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우리를 다루는 외교적 통치를 어찌할지 고독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북한내 반발 세력을 누그러뜨리고 경제 개발을 하는 것도 혼자 힘으로 해야 합니다.
어떤 위협이 와도 뒤를 받쳐줄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이 갓 30인 김정은이 이런 일을 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할 수 밖에 없겠죠.
그래서 지금은 어찌보면 김정은의 권력이 가장 센 시기이도 하지만, 가장 불안한 시기일지도 모릅니다.
남북한 정세가 어디로 갈지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입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
영상편집 : 신민희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