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민주화추진협의회 인맥이 정치권 안팎에서 재조명받고 있다. YS 국가장 장례위원이 정부 추천인사 808명과 민추협 창립멤버 등 1414명으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YS의 유훈인 통합과 화합을 위해 과거 민추협에 몸담았던 동교동계 인사들도 150명이 장례위원으로 선정됐다. 이에 YS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둥지였던 동교동계에선 권노갑·정대철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임채정 전 국회의장 등이 고문으로 참여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현 정치권에게 모범 사례가 된다는 평가가 나온다. 민추협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 큰 화두를 던지는 셈이다.
1984년 신군부독재 시절 꾸려진 민추협은 상도동계(YS)와 동교동계(DJ)가 주축이 돼 결성됐다. 당시 야권 핵심인 DJ와 YS는 정권에 의해 제도권 정치 참여가 배제된 상태였다. YS는 가택연금 상태였고, DJ는 미국 망명 중이었다. 라이벌 관계였던 YS와 DJ진영은 독재에 저항하고 양 세력의 연대를 도모하는 한편 제도권 정치 진출의 가교로 1984년 5월 18일 민주협을 조직했다.
민추협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동시에 이듬해 2월 12대 국회의원 선거 대비에 돌입했다. 공동의장은 당초 YS와 DJ였으나, 당시 망명 중인 DJ를 대신해 김상현 현 민추협 이사장이 공동의장 대행을 맡았다. 당시 상도동계 일각에선 “(김 이사장이)어떻게 YS와 같은 격이 될 수 있느냐”고 반발했지만, 이들을 YS가 직접 설득해 민추협이 꾸려진 것으로 전해진다. 민추협은 총선을 앞두고 정치활동 규제에서 해금된 김재광, 이민우, 이기택 등의 구 신민당 중진들과 더불어 신한민주당을 창당했다. 신민당은 총선에서 67석을 얻어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 1야당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합종연횡은 3년이 채 가지 못했다. 1987년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YS와 DJ의 분열로 인해 민추협은 결국 해체됐다. 이 과정에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는 다시 견원지간으로 돌변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시기를 거치면서 양대 세력은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했던 민추협은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YS와 DJ를 고문으로 한 법인체를 만들어 부활해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사단법인 민추협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나란히 이름을 올리는 체제로 꾸려졌다. 당시 이사장은 김상현·김명윤, 회장은 김덕룡·김병오, 수석 부이사장은 서청원, 부이사장은 신순범·박종웅·이협, 부회장은 박광태· 김무성·김장곤·이규택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원로협의체적인 성격으로 바뀌고 위상과 역할이 과거보다 약했지만, 우리나라
실제로 이 민추협을 통해 지난 2009년 DJ서거 때 YS의 상도동계 인사들이 장례위원에 다수 이름을 올렸다. 이번 YS 국가장에 동교동계 인사들이 참여하게 된 것도 민추협의 역할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명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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