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이 시행된 직후 한 사립학교 교장에게 신고가 접수됐다. 소속 교사가 특정인으로부터 3만원을 초과하는 식사 접대를 받았다는 제보였다. 교장은 해당 교사를 불러 얼굴을 붉히며 사실관계를 추궁했지만 교사는 “업무 관련성이 없는 자리였다”고 강력히 항변했다. 교장도 교사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신고자에게 ‘사실무근’이라고 통보했다가 자칫 사후에 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다. 결국 교장은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경찰 조사가 시작됐다. 한달 뒤 경찰도 문제없다는 결론을 전해왔지만 교장은 비슷한 상황이 또 발생하면 어떤 기준으로 위법 여부를 판단해야할지 난감했다.
◆민간 기관, 범죄 여부 1차 판단 책임
오는 9월28일 김영란법 시행 이후 민간 분야인 사립학교·언론사 등에서 벌어질 상황을 가정해본 사례다.
김영란법의 신고체계는 중층적으로 복잡하게 구성돼 있다. 김영란법상 ‘공직자 등’이 법을 위반한 사실을 포착했다면 국민 누구나 신고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포상금도 받을 수 있다. 신고는 국민권익위원회는 물론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 감사원, 감독기관, 공직자의 소속기관 어디에나 해도 된다.
신고 채널을 넓혀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중복 신고’로 인한 행정력 낭비가 발생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신고 내용이 복잡하게 이첩·통보되는 과정에서 최종 처리까지 ‘하세월’이 될 개연성도 있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지금도 청와대와 권익위, 감사원, 지자체 등 공직자 비위 내용을 제보할 수 있는 채널이 10군데가 넘는다”며 “보통 민원·신고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여러 곳에 동일한 내용을 제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신고자가 권익위에 부정청탁을 신고하면 권익위는 이를 다시 감사원·감독기관·소속기관 등에 이첩하고, 감사원·감독기관·소속기관은 다시 이를 재조사해 사안에 따라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하거나 관할 법원에 과태료 부과를 요청해야 한다. 조사 결과는 권익위에 다시 통보를 하고, 권익위는 다시 신고자에게 알려야 한다. 법조계 관계자는 “감독기관, 감사원, 소속기관, 수사기관에 중첩적으로 신고하도록 돼 있어 이중삼중 규제라는 지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여러 곳으로 신고가 접수돼도 결국 권익위쪽으로 일원화되지 않을까 예상된다. 권익위가 내부적으로 수사할 것인지 종료할 것인지 결정하는 구도가 될 것”이라며 “감독기관의 업무가 중첩되는 것도 사실이고 법이 거친 것도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위반행위에 대한 조사를 소속 기관에게 부여한 것이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김영란법이 적용되는 약 4만여개 기관 가운데는 조사 절차를 제대로 진행하기 어려운 소규모 기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직원 수가 5~6명에 불과한 군소 언론사들이 별도의 청렴 담당관을 두고 김영란법 위반 여부를 스스로 판단할 역량이 될 수 있는지에 의문이 제기된다. 청렴 담당관은 관련 교육부터 법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업무까지 담당하게 된다.
민간 분야의 경우 정부에서 구체적 기준을 마련해주지 않으면 결국 기관장이 해당 직원과의 친소관계나 인간적인 정리 등을 따져 자의적 판단을 내놓을 가능성도 높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민간 영역은 전혀 준비가 안돼 있을 것”이라며 “기관으로 신고가 들어오면 기관장은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검·경에 무조건 이첩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검·경, 실적용 표적수사 우려도
김영란법 위반 단속 주체가 될 경찰도 준비작업에 애를 먹고 있긴 마찬가지다.
최근 경찰청은 ‘김영란법 대응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자체적인 대비에 나섰다. 하지만 일선 경찰서까지 교육이 이뤄지기까지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법 시행 이후 혼란이 예상된다. 경찰청 관계자는 “김영란법 TF가 발족해 운영되고 있지만 경찰 차원에서 구체적인 단속 계획 등 액션플랜은 권익위 지침이 나온 이후에야 진행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고발이 셀 수 없이 밀려들 것으로 예상되는데, 지금도 일선 경찰들은 각종 특별단속으로 업무 과다를 호소하고 있다 ”며 “김영란법 고발 건을 일일이 제대로 조사하기엔 인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각급 법원도 김영란법 위반 사건이 밀려들면 인력난을 호소할 것으로 보이지만 관련 인력이나 예산 등은 마련되지 못한 상황이다.
반대로 검·경이 김영란법 시행 후 실적을 내기 위해 이른바 ‘선택과 집중’에 나선다면 이는 표적·기획 수사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검·경 입장에서는 김영란법 위반 혐의 사례는 손만 뻗으면 언제든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골치 아프게 대가성, 직무 관련성을 따져야 할 필요도 없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검찰이나 경찰이 (김영란법 위밥 사례를) 인지해서 수사할 수 있게 되면 안 그래도 경찰이나 검찰의 권한 남용이 자주 문제되는 상황에서 정부에 비판적인 기자, 교수 등이 표적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김영란법은 공직자의 배우자가 금지된 금품을 수수했을때 공직자가 이를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불고지죄’ 조항을 담고 있다. 이 역시 실제 수사단계에서 논란
국가보안법에서도 동거 가족의 경우 불고지죄 적용의 예외를 인정받는 것과 비교해도 지나치다는 지적이 있고, 오는 28일 헌법재판소 결정에서도 이 대목이 핵심 쟁점 중 하나다.
[기획취재팀]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