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으로 무상급식을 제공하는 데 대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공짜 점심'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의하지 않는 곳이 바로 회사다. 부하직원의 '공짜 점심'이 상사에게는 '등골 브레이커'가 될 수 있지만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
한국 직장에서 미풍양속이자 불문율로 여겨지는 것 중 하나가 식사비용은 당연히 상사가 지불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없을까.
"후배를 애인만큼 사랑하지는 않는데요? 더군다나 애인은 한 명이기라도 하지…"
데이트 비용보다 많이 들어간다는 후배의 밥값. '쫀쫀한 상사'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 치는 직장인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 "같이 먹으면 사줘야 한단 말이야"
중소기업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A씨는 평소 열정적이고 쾌활한 업무태도와는 다르게 점심시간에는 늘 혼자다.
처음에는 다소 부담스러워도 팀원들에게 매끼니를 '대접'했다. 한국인의 정서상 밥과 술을 사주는 것이야 말로 인맥 형성의 지름길이라 믿었던 A씨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묻어두려 했다. 하지만 경기불황으로 월급은 깎인데다 점심값만 하루 10만원, 한달 200만원 가까이 소요되자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었다.
A팀장은 "오늘도 점심약속이 있다고 말하고 먼저 나왔다"며 "요즘 점심시간에 운동·어학공부 등 자기계발을 위해 혼자 밥을 먹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는데, 내 경우는 점심값 재테크를 위한 '나홀로족'인 셈"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 "싼 건 사주고도 욕먹어"
대기업 차장인 B씨는 최근 적지 않은 '쇼크'를 받았다. 여직원들에게 점심을 사준 다음날, 듣지 말아야 할 부하직원들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자화장실서 밖으로 들리는 목소리였다.
"B차장은 매일 백반이야. 그러려면 사 주질 말든가"
허리띠 졸라가며 부하들을 먹여살리던(?) B차장은 화가 나다 못해 눈물이 핑 돌았다. 더욱 난감했던 건 그날 점심시간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점심시간이 되자 자신에게 달려오는 부하직원이 B차장의 눈에는 굶주린 한 마리의 맹수같아 보였다.
B차장은 "윗사람에 대한 존경은 사라지고 아랫사람에게 베풀어야 하는 의무만 남은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 가위바위보! 그래도 어차피 보태줘야…
상사들은 직장 후배에게 얻어먹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치페이를 제의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서 머리를 짜내어 생각한 것이 가위바위보·사다리타기 등 소위 요행을 노리는 것이다. 내기는 '상사의 밥값내기'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식사 지불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요행문화로 '밥값에 대한 미풍양속'을 완전히 저버리기는 힘들다는 게 상사들의 전언이다.
시중은행 팀장인 C씨는 "가끔 점심값을 가위바위보로 몰아 안내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여 보태주거나 찻값을 내게 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오히려 쪼잔해 보일까 두려워 내가 그냥 내버리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선배가 무조건 밥값을 지불하는 '코리안 페이'는 특유의 정(情) 문화로 팀원들의 결속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당연시 돼 왔다.
그러나 사실 '공짜 점심'은 없다. 실력보다 인맥을 앞세우면 부정부패가 늘어날 가능성이
국내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상사의 무조건적인 밥값내기가 사라지면 권위에 대한 불편함도 함께 줄어든다"며 "이와 함께 실력보다 정이 우선시되는 부정적인 기업문화까지 재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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