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승진 시즌이 다가오는 올 가을 긴장의 고삐를 바짝 죄는 직장인들이 많다. 일주일씩 연차 휴가를 내 '열공' 모드에 들어가는가하면, 선배들에게 각종 아부기술을 발휘해 줄을 서거나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를 구하기 위해 혈안이다.
입사 때만해도 도토리 키재기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쉽게 넘어설 수 없는 벽처럼 우뚝 선 동기들이 요즘따라 부쩍 신경 쓰인다. 동기들은 벌써 승진했는데 나만 만년 대리로 살 것인지, 아니면 제 때 과장으로 올라가 당당히 부러움의 대상이 될 지 기로에 선 직장인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승진 필기시험 준비하려고 일주일 휴가 낼 거에요"
10대 그룹 중 유일하게 과장 승진을 하기 위해 필기시험을 치러야하는 L그룹 최 모 대리는 조만간 일주일 연차 휴가를 낼 계획이다. 10월 중순쯤 볼 시험 과목 중 회계, 경영, 경제 등 어느 하나 쉬운 게 없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 졸업과 동시에 관련 서적을 손에 놓은지 오래된 상태에서 시험을 보려면 최소 일주일이라도 도서관에 콕 박혀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 대리는 "시험이 워낙 어려워 재수, 삼수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며 "퇴근하고 나서 책을 본다해도 하루 최대 2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빠듯해 연차 내는 게 유난떠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 L그룹에서 계열사별로 과장 승진을 앞둔 대리들은 매년 2000여명이 넘을 정도로 많다. 여기에 재수, 삼수생까지 가세하면 경쟁률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진다.
다른 그룹과 달리 필기시험을 고집하는 회사가 다소 '올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룹의 오래된 전통이란 자부심과 동시에 매년 과장 승진 시험의 우수 성적자에게 쏠리는 회사 관심에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킨다.
이 그룹의 또 다른 대리는 "한날 한시 대학 캠퍼스에 모여 필기시험을 치르다보니 실제로 그 날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다시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며 "회사 사장님까지 시험 장소로 나와 응원을 해주시기 때문에 과장 승진 시험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고 전했다.
매년 과장 승진 시험의 수석자가 어느 계열사에서 나오는 지 그룹 전체가 지켜보고 있는 통에 인사 고과가 좋은 대리일수록 대학 과 수석을 노리듯 시험에 임하게 되는 것. 결국 과장 승진 시험이 그룹 계열사별 자존심 대결인 셈이다.
◆자필로 쓴 자기소개서에 임원진 앞 발표는 기본
S그룹의 정 모 과장은 과장 승진 시험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마치 신입사원 시험을 보듯 압박 면접을 치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일 문서 작업에만 열중한 나머지 펜을 잡아본 적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인데, 자기소개서를 자필로 작성해 제출해야하는 탓에 그 중압감 역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정 과장은 "선배들 사이에 족보 비슷한 것이 내려오긴 하지만 매년 그룹이 처한 상황에 따라 질문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정답이란 게 따로 없다"며 "그룹의 홍보를 하지 않는 이상 계열사별 현안을 다 알기란 쉽지 않고 설사 안다해도 임원진 앞에서 과연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막연한 게 사실이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동고동락한 동기들과 면접 스터디를 같이 하자니 나만의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려울 것 같아 선뜻 함께 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공부를 같이 한다고 해도 자신만의 차별화된 전략이 노출될까봐 알맹이는 쏙 뺀 어정쩡한 모임이 되기 일쑤다.
정 과장이 대리 시절 또 애를 태운 것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신입사원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달성한 업무를 잘 설명하는 일이 관건으로 이 또한 어느 정도 수위에서 말을 해야할 지 고민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소서라는 게 결국 임원진들에게 내 존재감을 알려 승진의 기회를 거머쥐는 통로인데, 무조건 내가 잘났다고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겸손하게 나가자니 수많은 동기들 사이 경쟁력이 없어 보여 준비하는 내내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승진 때마다 후배들 평판 관리에 돈 나가는 김 대리
몇 년째 과장 승진에서 물을 먹고 있는 김 모 대리는 승진 시즌만 돌아오면 주변 후배들, 동기들에게 점심, 저녁을 사느라 용돈이 모자란다. 평소에는 후배들이 조금만 실수해도 버럭하는 김 대리지만 인사고과 철이 돌아올 때마다 자신의 평판 관리를 위해 바짝 엎드려 지내는 것이다.
김 대리는 "어느 날인가 선배들에게 제가 승진이 안되는 이유를 물어보니 후배들에게 잘 좀하라는 얘기를 들었어요"라며 "승진에 앞서 선배 뿐 아니라 후배들 사이 평판을 들어보는데 제가 영 별로라는 얘기였죠"라고 전했다.
그와 같은 말을 들었을 당시 충격은 꽤 컸다. 하지만 다혈질인 그는 쉽게 자신의 성격을 바꾸지 못했다. 대신 승진 시즌 한달 전부터는 '온화·인자 모드'로 변신, 그 동안 후배들 사이에 깎인 점수를 만회하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했다. 비싼 점심을 사는 일은 후배들
김 대리는 "물론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며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만년 대리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것 같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임하고 있다"고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매경닷컴 방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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