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행 심사팀의 이OO라고 합니다. 저희 쪽 대출 신청하셨는데 지금 마무리가 안 되셔서 원래 어제 전화를 드렸어야 하는데…. 아침 미팅에서 고객님이 안건으로 올랐습니다. 우선 본인 확인을 위해 주민번호 7자리 확인 부탁하겠습니다."
저축은행에 1000만원 대출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한 김 모씨는 이튿날 저축은행 대표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대출을 신청한 저축은행이며 본인 이름까지 줄줄 읊어대는 '상대편'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김씨는 다시 대출이 가능하다는 말에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요구하는 인지세, 보증보험료 등 170만원을 바로 보냈다가 사기를 당했다.
보이스피싱을 수사하던 전직 경찰관이 가담한 범행 조직의 치밀하고 대담한 수법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김씨처럼 피해를 본 사람은 수만명, 액수는 400억원에 달할 것으로 검찰은 추정하고 있다.
조직원들은 번갈아 전화하며 대출 수수료, 보증보험료, 인지대, 신용조회 삭제비 등 명목으로 적게는 수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까지 가로챘다. 4000만원 피해를 본 50대는 음독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범행 조직의 한 가운데는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에서 보이스피싱을 수사하던 전직 경찰관 박모(42·2008년 해임)씨가 있었다. 보이스피싱범을 잡는 데 앞장섰던 경찰관이 자신의 수사경험을 범행에 활용한 것.
심지어 그는 자신이 수사한 피의자 3명(2명 구속기소·1명 기소중지)을 조직원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의 조직원은 검찰 조사에서 박씨는 저축은행 대출을 가장한 보이스피싱의 '원조' 격이라며, 이런 류의 유인 전화 중 70%가량은 자신들이 했다고 진술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직 경찰관도 가담했다. 서울 한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현직 경찰관은 조직원으로부터 1000만원을 받고 간부급 조직원들의 수배 상황을 알려주는 등 퇴직 경찰관의 뒤를 봐줬다.
이들 조직원은 저축은행 서버를 해킹, 대출이 거절된 신청자의 명단을 중국 해커로부터 입수해 피해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용·담보 부족 등으로 대출조차 여의치 않은 서민 입장에서는 "어제 신청한 대출을 다시 심사하니 가능하다"고 같은 저축은행에서 통보하니 속어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일부 피해자들이 "저축은행 직원인지 입증해보라"고 의심하자 여신금융협회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은 상담 직원의 사진을 이용해 위조한 주민등록증 사본을 팩스로 보냈다.
사본을 보내주며 여신금융협회 홈페이지에서 보내준 신분증을 확인해보라는 친절한 안내도 곁들였다.
범행은 교육부터 시행까지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대출 희망자의 예상질문과 상황별 대처요령 등을 담은 매뉴얼과 상급자의 실제 범행과정을 녹음한 음성파일을 이용해 신입 조직원에 대한 교육도 이뤄졌던 것이다. 행정부처가 발간한 '보이스피싱 피해 방지대책' 문건을 새로운 범행수법을 개발하는 데 역이용하기도 했다.
광주지검 형사 2부(윤대진 부장검사)는 조직원 26명을 구속기소하고 수배조회를 해준 경찰관 등 6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교육'을 담당한 전직 광고모델, 모델의 오빠인 전직 프로야구 선수, 전직 여행사 본부장 등 다양한 경력의 조직원들은 자금 총책, 인력 담당, 필리핀·중국 현지 사장, 전화유인책, 환치기상 등 역할을 분담했다.
검찰은 또 필리핀에 있는 박씨 등 조직원 21명을 지명수배하고 가명을 사용해 인적사항이 확인되지 않은 50여명을 추적 중이다.
앞서 검찰은 지난 3월 첩보를 입수해 내사에 착수
[매경닷컴 속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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