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는 동기가 있습니다.
자살도 그렇고, 살인도 그렇습니다.
묻지 마 살인 역시 우울증과 사회불만과 같은 그래도 뭔가 이유를 설명할 만한 동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동기를 찾아내기란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하물며 유서가 있는데도 의혹을 낳는 사건이 많습니다.
국정원 직원 임 과장의 자살 사건도 비슷합니다.
오늘 임 과장의 발인식이 있었습니다.
육군사관생도인 큰 딸이 영정 사진을 들고 앞장서자 유족들의 오열이 터져나와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영면의 길로 떠나는 고인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나오는 것이 안타깝지만, 왜 그런 허망한 죽음이 있었는지 밝히는 것은 꼭 필요해 보입니다.
국정원조차 왜 임 씨가 극단적 선택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랬는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내놓고 있습니다.
국정원 직원들은 그냥 임 씨의 유서 내용을 그대로 믿어달라는 성명까지 발표했습니다.
임 씨가 남긴 유서에는 "내국인에 대한 사찰은 없었다. 외부에 대한 파장보다 국정원의 위상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혹시나 대테러, (대북) 공작활동에 (오해를 일으킨) 지원했던 자료를 삭제했다. 저의 부족한 판단이 저지른 실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유추컨대 임 씨는 자료를 삭제한 것에 큰 심적 부담을 느낀 모양입니다.
국정원의 해킹 의혹이 언론에 보도된 것은 지난 10일입니다.
임 씨 역시 이탈리아 '해킹팀'의 서류가 해킹으로 유출됐고, 자신이 주도한 사업이 문제가 됐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을 겁니다.
내국인 사찰 가능성이 제기됐고, 14일 국회에 출석한 이병호 국정원장은 해킹프로그램 구입 사실을 시인했습니다.
하지만, 내국인 사찰은 전혀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 인터뷰 : 이철우 / 국회 정보위원회 여당 간사(7월14일)
- "(국정원은) 의혹에 대해 모두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국정원이 구입한 소프트웨어 수량이 소량, 20명 분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이 원장의 대답은 사실상 내부 조사가 끝났음을 전제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해킹프로그램을 구매했고, 이를 누구에게 적용했는지 내부 감찰이 어느 정도 끝났다는 겁니다.
17일에 국정원이 사용 기록을 공개하겠다고 자신 있게 밝힌 것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아마도 국정원은 임 씨를 불러 전후 사정을 다 보고 받았을 것이고, 내부 감찰도 시작했을 겁니다.
임 씨가 이 과정에서 일부 자료를 삭제했다고 솔직히 밝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혹여 삭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면, 이는 곧 들통날 거짓말이었던 만큼 임 씨의 심적 압박은 상당했을 겁니다.
국회 정보 위원들이 전하는 말을 들어보면, 임 씨는 내부 감찰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심리적 압박을 느꼈고, 삭제 사실이 드러날까봐 조마조마했다고 합니다.
삭제 사실을 사실대로 밝혔어도, 왜 굳이 삭제했느냐는 강도 높은 내부 질책이 뒤따랐을 겁니다.
결국 임 씨는 언론보도 이후 일주일간 극심한 정신적 공황 상태를 겪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서에 나온 대로 자신이 큰 실수를 한 셈입니다.
이쯤 되면 자살의 동기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된 듯보입니다.
하지만 임 씨가 왜 자료를 삭제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100% 복원 가능하다는 것을 임 씨 스스로 잘 알았을텐데, 왜 삭제했을까요?
또 복구 불가능하게 완전 삭제하는 방법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임 씨가 왜 복구 가능한 방식으로 자료를 삭제했을까요?
다급한 마음에 그랬을까요?
내국인 사찰이 없었다면, 굳이 이렇게 서둘러 삭제할 필요가 없는 자료인데 말입니다.
일각에서는 임 씨가 7월초 중고 마티즈를 산 것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부인차가 있는데 왜 굳이 중고차를 샀느냐는 겁니다.
또 번개탄을 구매한 장소를 아직 확정하지 못한 것을 놓고도 제3의 타살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임 씨의 자살을 타살로 보기는 무리인 듯합니다.
삭제된 자료가 100% 복구되면 임 씨의 자살 동기가 보다 분명해질까요?
상주 할머니의 살충제 사이다 사건도 동기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어제 용의자인 80대 박 모 할머니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습니다.
경찰이 제시한 혐의점을 받아들인 셈인데요.
경찰이 제시한 증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박 할머니 집에서 사이다에 든 살충제와 같은 성분의 농약 병과 자양강장제 병이 발견된 점입니다.
물론 박 할머니는 20년 동안 쌀 농사를 짓지 않았으니 이 살충제가 있을 이유도 없고, 누군가 자신의 마당에 던져 놓은 것이라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만큼 박 할머니 구속의 결정적 이유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둘째, 박 할머니 옷과 스쿠터에서 농약 성분이 검출된 겁니다.
애초 박 할머니는 쓰러진 분의 입 거품을 닦아주다가 자신의 옷과 스쿠터에 묻었다고 했지만, 국과수 분석결과 피해자들의 입 거품에서는
농약 성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박 할머니의 해명이 석연치 않습니다.
셋째, 구급차가 도착했을 당시 블랙박스에 찍힌 할머니의 행동이 수상쩍었다는 겁니다.
쓰러진 다른 할머니를 돕지도 않고 뒤돌아서 간 점, 그리고 마을회관 안에 다섯 명이 더 쓰러져 있는데 이를 구급대원에게 알리지 않아 결과적으로 50분 뒤에 발견된 점을 들었습니다.
친구들이 쓰러졌으면 빨리 신고하거나 도와주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이를 반박하는 가족들의 얘기도 있습니다.
박 할머니 딸의 이야기입니다.
▶ 인터뷰 : 용의자 '박 할머니' 딸
- "우리 엄마가 '어카까 어카까' 하면서 (피해자를) 따라나왔어요. '누구 엄마가 지금 쓰러져서 아프다'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도 아무도 안 나왔대요. 3년 전에도 마을에 식중독이 있었대요. 다 같이 모여서. 그렇게 '어디서 배가 아파서 그런가 보다' 이렇게 생각했던 거에요. 아무리 불러도 안 나와서 그냥 왔고 집에 누워 있었대요. 너무 놀래서."
▶ 인터뷰 : 용의자 '박 할머니' 딸
- "우리 엄마가 '왜카까' 하면서 피해자들 구토를 다 닦고 있었대요. 주도면밀하게 박카스 병에 지문 하나 안나오고 이렇게 무서운 사건을 할 사람이 그 구토를 다 만지고 내려오는 사람이 어딨는데요? 그런 사람이 살충제를 옷에 묻혔겠습니까? 재수사 원하죠! 재수사 해야지! 누워있는 피해자도 재수사 해야 한다잖아요!"
의식이 돌아온 다른 할머니는 박 할머니가 온화한 성품이고, 70년 넘게 같이 살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전날 화투를 치다 다퉜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렇다고 한가족이나 같은 친구들을 농약으로 살해하려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국정원 임 모씨의 자살, 그리고 박 할머니의 행동, 모두 그 동기가 속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사 모든 것이 진실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 두 사건만큼은 왜 그랬는지 동기가 납득할 수준에서 드러났으면 합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
영상편집 : 이가영 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