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세상을 떠난 A(사망 당시 68세)씨는 생전에 20여년간 결혼생활을 한 본처와 협의이혼하고 나서 B(55·여)씨와 사귀다 4년 만에 동거를 시작해 11년간 사실혼 부부로 지냈습니다.
A씨는 숨지기 1년 전 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B씨는 A씨의 병시중을 드는 등 간호를 하다 A씨가 숨지기 3개월 전에 관할 구청에 혼인신고를 했다. 혼인신고서에 A씨의 자필 서명과 도장을 받아 구청에 냈습니다.
그러나 A씨가 숨지자 전처 딸은 아버지와 B씨의 혼인을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A씨의 딸은 "B씨가 일방적으로 혼인신고서를 작성해 제출한 것으로 아버지의 진정한 혼인의사가 없었다. 설사 아버지가 혼인의사를 표현했더라도 죽음을 앞둔 상태여서 참다운 부부관계를 성립하려는 의사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딸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심은 "필적감정 결과에 의하면 혼인신고서의 필적이 A씨가 평소 직접 작성한 필체와 동일해 보이고 A씨가 혼인신고 10일 전에도 직접 은행을 방문해 3억여원을 인출해 B씨에게 주는 등 재산상 처분행위를 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습니다.
병원 기록상에도 혼인신고 당시 A씨의 의식이 명료했던 것으로 기재돼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가정법원 가사2부(배인구 부장판사) 역시 "원고가 추가로 제출한 증거를 봐도 A씨가 혼인신고 당시 혼인의사가 없었음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습니다.
2일 법조계에 따르면 늙은 부모의 재혼에 반대해 자식들이 혼인무효 소송을 내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특히 늘그막에 마음에 맞는 상대를 만나도 자식들 눈치를 보며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그냥 동거하고 있다가 나중에 한쪽이 사망하게 되면 문제가 불거지게 됩니다.
현행법상 사실혼 관계 배우자는 이혼(사실혼 파기)시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지만, 상대 배우자가 사망하면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살던 배우자가 다른 한쪽의 사망을 앞두고 뒤늦게 혼인신고를 하는 경우가 빈번해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식들이 소송을 낸다는 것입니다.
상속재산의 지분은 법적으로 인정된 배우자와 자녀가 1.5대 1로 나눠갖게 돼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고인의 상속 재산이 적지 않으면, 자식들이 아버지(또는 어머니)와 오랜 기간 동거하거나 생전에 간병과 임종까지 지킨 재혼 배우자를 상대로 상속 지분을 뺏기기 싫어 혼인무효 소송을 내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사실혼 배우자와 혼인관계 파기시 재산 분할은 인정하면서도 배우자 사후에는 상속 지분을 인정하지 않는 현행 법제도도 한 원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런 법제도로 인해 동거하던 사실혼 배우자가 늙어 병에 걸리거나 위독해지면 사망하기 전에 재산을 확보하려고 건강한 배우자가 사실혼파기(이혼) 소송을 내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실혼 관계에서는 배우자가 사망하면 다른
한 변호사는 "사별이나 이혼으로 홀로된 노인들이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의지할 사람을 찾아 사실혼 관계를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자식들은 부모 부양과 간병의 부담을 덜게 돼 내심 반기다가도 부모가 사망하면 상속재산 때문에 태도를 바꾸곤 한다"며 "고령화 사회의 한 세태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