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민주화운동으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 유기를 도운 김덕모(76)씨가 14일 경남 창원 국립 3.15묘지에서 김 열사의 묘비를 찾아 56년만에 참회의 사죄를 했다.<제공=김주열 열사 기념사업회> |
4·19 혁명의 시발점이 된 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 유기를 도운 20대 청년이 56년만에 백발이 되고서야 김 열사의 묘를 직접 찾아 속죄의 눈물을 흘렸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차량으로 옮겨 부두에 버린 김덕모(76)씨는 13일 오후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국립 3·15민주묘지를 찾아 김 열사의 묘에 헌화환 뒤 “미안하오”라고 수차례 사과의 말을 되풀이했다.
김주열 열사는 지난 1960년 3월15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최루탄을 맞고 숨졌다. 그의 시신은 마산 앞바다에서 며칠 후 떠올랐고, 이 사건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김씨는 당시 최루탄을 맞고 숨진 김 열사의 시신을 부두로 옮겨 버린 당사자 중 한명이었다. 김씨는 당시 20살 청년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운전을 배워 마산의 한 사업가의 지프 운전기사로 일했다. 차량이 흔치 않던 시절 경찰은 이 사업가의 차를 간혹 빌려썼고, 3·15 당시에도 김씨는 경찰에 파견돼 있었다. 그날 공교롭게도 그의 차를 탄 사람은 김 열사에게 최루탄을 쏜 마산경찰서 박종표 경비주임(당시 경위)이었다. 김씨는 하루 뒤 박경위의 지시로 오전 5시쯤 차를 몰고 마산세무서에 도착해 인근 도랑에 반듯이 누워있는 김열사의 시신을 처음 봤다. 다가가보니 김열사는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 숨져 있었다. 박 경위 등 경찰 3명과 민간인 1명이 김열사의 시신을 차로 옮겼고 김씨가 직접 운전을 했다. 당초에는 김열사의 시신을 인근 야산에 묻을 계획이었으나 가는 도중 마산 제1부두(현 가고파 국화축제장) 앞 바다에 버리기로 계획이 변경됐다. 이들은 부두에 있던 철사를 이용해 김 열사의 시신과 돌을 한데 묶어 바다에 던졌고 김 열사의 시신은 4월11일 마산 중앙부두쪽에 떠올랐다. 김 열사의 처참한 모습은 사진을 통해 마산뿐 아니라 전세계로 알려졌고 결국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김씨는 그 뒤 경찰조사를 받았으나 경찰 지시로 인한 단순 운전이라는 이유로 풀려났다.
김씨는 그 후 죄책감에 시달렸고, 성당을 다니며 매일 참회의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중 지난해 10월 9일 우연히 라디오에서 김주열
김 씨는 “지금에 와서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이 되지 않겠지만 천당에서 행복하게 지내시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창원 = 최승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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