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대행사 대표, 건축가, 변호사, 평범한 직장인이 한 자리에 모여 수업을 듣는 곳이 있다. 로스쿨도, 대학원도 아니다. 생업을 위한 자기계발 강좌도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 민간 문화예술 교육·컨설팅 기관인 에이트 인스티튜트의 수업 현장이다. 박혜경 에이트 인스티튜트 대표(49)는 “순수미술을 전공했지만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수강생은 ‘메마른 일상을 보내다가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지적인 유희를 즐길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하더라”고 했다.
박 대표는 국내 1호 경매사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서울옥션 재직 당시 2007년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를 당시 최고경매가 45억2000만원에 낙찰했을 때 낙찰봉을 쥐고 있었다. 그는 이중섭 화백의 ‘황소’를 비롯해 200회를 넘는 경매를 진행하며 서울옥션 총괄이사직까지 올랐지만 2009년 안정된 자리 대신 미술 교육사업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었다. 박 대표는 에이트 인스티튜트를 설립한 이유에 대해 “당시는 한창 성장해온 미술시장이 주춤하던 시절이었다. 미술시장의 저변을 넓히고 산업으로 자리 잡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 교육, 컨설팅 기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에이트 인스티튜트에서는 해마다 120여 회에 달하는 강의를 진행한다. 미술 애호가를 위한 아트 클래스부터 전문가 육성을 위한 과정까지 다양하다. 지난 6년간 600명이 넘는 인원이 크고 작은 정규과정을 거쳐 갔다.
박 대표는 지난해부터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미술품 감정 아카데미 과정을 국내 최초로 개설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센터에서 예산을 지원했다. 그는 “최병식 미술평론가, 이태호 교수, 송향선 한국미술품감점협회 위원장 등 전문가들로 강사진을 꾸렸다. 감정은 미술품과 미술시장을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하는 부분이다. 일반인들도 작품에 대한 안목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품과 위품을 구분하고, 작품의 시가를 감정하는 일은 미술시장이 커질수록 중요해지죠. 어떤 산업분야든지 투명한 유통 질서가 잡혀있지 않으면 진화하고 성장할 수 없어요. 감정은 예술 산업의 중요한 인프라입니다. 더 축적하고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관의 노력이 필요하죠.”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 등 시대를 풍미한 작가들의 작품은 위작 논란에 휩싸였고, 미술계를 사회적 이슈로까지 번졌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사회적 자산으로서의 미술 자료가 많이 축적돼야 한다. 한 작가의 전 작품을 정리한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e, 전작도록)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라며 “문화체육부가 한국 근·현대 작가들의 카탈로그 레조네 사업과 영문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백남준 작가도 10주기를 맞아 아카이브 작업이 한창이다. 공공기관과 미술계에서 이런 흐름을 더 확산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가 최근 관심을 쏟고 있는 분야는 한국 고미술이다. 하반기부터는 김홍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유홍준 교수, 방병선 교수 등을 강사진으로 하는 고미술 특강을 시작한다. “LA 카운티 미술관이 내후년 한국 고미술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요. 그 시기에 맞춰 글로벌 미술시장에 한국 고미술을 제대로 알리고 싶습니다.”
경매사부터 사업가까지 미술 시장에 평생을 바친 박 대표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유명 수집가이자 억만장자 사업가인 엘리 브로드의 말을 빌려 답했다. “엘리 브로드는 ‘미술품을 수집하는 이유는 가장 지적인 영감을 끊임없이 주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예술이 이 시대에 줄 수 있는 가치와 영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미술 콘텐츠 비즈니스를 통해 기여하고 싶어요.”
박 대표에게 사업가로서의 목표가 아
“고(故) 백남준 작가 작품이 100만달러의 벽을 못 넘었어요. 작가의 명성, 작품의 가치에 비해 너무 저평가된 거죠. 한국 작품으로 1000만달러가 넘는 경매를 성사시키는 게 꿈입니다.”
[홍성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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