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15일 오전 경북 포항시 남구 철강로 포항철강공단내 W철강. 포스코·현대제철 협력업체이면서 코스닥 상장업체로 한해 수백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던 이 기업의 정문은 이날 굳게 닫혀 있었다. 중국산 저가 제품의 공격과 조선업계 부진 등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영업 손실을 견디지 못해 결국 폐업했다. 근처 J스틸코리아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강관 파이프를 생산하는 이 업체는 폐업한 뒤 경매로 나왔지만 유찰을 거듭하고 있다. 포항철강산업단지관리공단에 따르면 공단 내 공장 343곳 가운데 폐업이나 휴업에 들어간 공장은 전체의 11%인 39곳에 달한다. 공단내 부동산중개업소들은 “공장 매매나 임대 물건이 나와도 거래는 커녕 문의조차 없다”고 하소연했다.
#2. 지난 14일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는 ‘하반기 1만명 정리해고설’ 등 흉흉한 소문이 난무했다. 퇴근길에 만난 한 근로자는 “오는 8월부터 해양플랜트 물량이 바닥나면 협력업체 근로자 수천명이 실직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사측은 근거없는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이 사상 최악의 경영난을 겪으면서 대규모 구조조정설은 직원들 사이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제조업의 마지막 보루인 동남권 경제벨트가 무너지고 있다. 포항을 기점으로 울산~부산~거제까지 이어지는 동남권 경제벨트가 지속적인 세계 경기 불황과 내수침체, 주력산업 부진 등으로 1970년대 경제벨트가 형성된 이후 40여 년만에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매일경제신문이 동남권벨트 주요 공단을 둘러본 결과 상황은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포항철강공단은 고용 사정도 악화됐다. 이곳 근로자는 지난 1월 기준 1만5161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00여명 줄었다. 포항철강공단의 2015년 생산액은 13조7681억원, 수출액은 32억달러로 전년 대비 생산액은 19%, 수출액은 27%나 감소했다.
울산 현대중공업의 경우 최근 소식지를 통해 공개한 상황은 충격적이다. 해양플랜트는 2014년 11월 이후 16개월째 신규 수주가 없고 내년에 새로 건조할 수 있는 선박은 1척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내년 하반기에는 물량이 없어 도크가 비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협력업체들은 생사기로에 놓여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20여개 협력업체가 폐업해 근로자 2600여명이 직장을 잃었다.
울산 경제의 또 다른 한 축인 석유화학업계는 올들어 유가가 상승하면서 사정이 나아졌으나 시장 상황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SK에너지는 최근 울산에 짓기로 했던 석유화학설비 건립 계획을 철회했다. 울산의 자영업자들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지난 14일 찾아간 울산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앞 식당가는 퇴근 시간이 막 지났는데도 인적이 드물었다. 한 음식점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현대중공업 회식이 사라져 타격이 크다”고 토로했다.
부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지난 15일 오후 부산의 대표적인 산업단지인 녹산산업단지. 조선기자재와 철강업체들이 모여 있는 공단 곳곳에는 공장 임대·매매 현수막이 가득했다. 광고판 하나에 내리 5개의 공장 임대 현수막이 붙어 있을 정도다. 전봇대나 공장 담벼락에도 매매 임대 등을 알리는 문구로 도배가 돼 있다. 녹산산단에서 10년째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하고 있는 하나공인중개사 박영애 소장은 “지난해 말부터 공장 매물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며 “녹산 1000여개 필지에서 40여개 정도가 임대로 나와있다”고 말했다. 박 소장은 “불과 4~5년 전만 해도 매물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자기 공장 땅을 분할해서 임대하는 경우까지 생겼다”며 “경기가 안 좋다보니 자기 공장을 줄이고 대신 임대수익이라도 얻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부동산중개업소 관계자는 “최근 공장 경매는 부지 뿐만 아니라 기계까지 포함해 경매로 넘어오는 경우가 많다”며 “그만큼 기업들이 어렵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부산지역 주요 공단의 공장 가동률도 급감하고 있다. 한국산업단지공단 부산본부 관계자는 “녹산산단의 경우 2008년에는 공장 가동률이 80%대였는데 지난 2월에는 63%까지 떨어졌다”며 “인근 신호산업단지도 지난 1월에는 98%까지 올라간 공장가동률이 2월에 84%까지 급락했다”고 말했다. 업계는 이같은 불황이 지속되면 기업의 연쇄 부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암울한 진단을 내놓고 있다.
동남권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 지역 도시들도 황폐해지고 있다. 1인당 소득 4~5만불 신화는 물거품이 된지 오래다. 지난 15일 오후 포항 남구 대잠네거리. 포항시청에서 1km 떨어진 이 곳은 포항철강공단과 포항시청을 오가는 주요 길목에 위치해 있지만 건물 내 상당수가 비어있다. 임대 중개를 맡은 부동산 관계자는 “임대가 워낙 안 돼 임대료를 크게 낮췄는데도 문의가 거의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포항시에 따르면 지난해 포항지역 일반음식점 폐업 수는 2013년 326곳에서 2014년 336곳, 지난해는 391곳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산업도시 울산에서는 근로자수가 줄면서 부동산 시장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2012년 기준 현대중공업의 협력업체 근로자 수는 4만명에 육박했으나 올들어 3만5000여명으로 5000명 정도 줄었다. 이 때문에 원룸 임대료도 한때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가 60만원까지 했으나 지금은 30만원으로 절반이나 떨어졌다.
조선도시인 경남 거제는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 등 양대 조선소의 수주가 실종돼 대규모 직원 감축설이 나오면서 도시전체가 패닉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대우조선에 다니는 조 모(45)씨는 “조선소 신용등급이 떨어지면서 대출금리도 0.5%나 올랐다”며 “더 나빠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가중되면서 소비가 빠르게 얼어붙고 있으며 지역상권이 크게 위축되고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전기료 등 공공요금 연체 사례까지 발생해 우려를 낳고 있다. 한전 경남본부가 집계한 거제지역 1개월 이상 전기요금 체납호(戶)수의 경우 지난해 2월 연체호수는 3352호였으나 올해 2월에는 4157호로 805호가 늘었다. 한전
한 업계 대표는“과거 여러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때는 없었다”며 “구조조정도 하고 수출 전환 등으로 역량을 결집해야했는데 기회를 놓쳐 불황이 장기적으로 고착화되면서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며 한숨지었다.
[박동민 기자 / 서대현 기자 / 최승균 기자 / 우성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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