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의 현행 교양과목 평가방식, [자료출처 = 서울대 기초교육원] |
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 연구교수 출신인 이혜정 교육과 혁신 연구소장이 서울대 최우등생 46명을 인터뷰하고 1213명의 학생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다. 서울대에서 성적이 가장 높은 최우등생 46명 중 87%는 성적을 잘 받는 비법으로 "강의 시간에 교수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다 적는다"고 대답했다. 고등학교에 이어 대학에서조차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암기기계'가 돼야만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가 좋은 성적을 받기위해 이같이 학생들 스스로가 '받아쓰기식' 학습을 자처하는 교육 풍토를 바꾸는 실험에 나선다.
28일 서울대 기초교육원에 따르면 전교생이 듣는 필수교양인 '학문의 기초' 교과목 중 일부의 평가방식을 'A~F 학점식 상대평가'에서 성적이 없는 '합격·불합격(Pass·Fail)'으로 로 바꾸기로 했다. 학교측은 이를 내년 1학기부터 일부 학부·학과를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시행한뒤 대학 전체로 점차 확대할 계획이다.
지금은 체육 등 일부 선택교양 과목에만 이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이재영 서울대 기초교육원장은 "인간과 소통하는 글쓰기·언어능력이나 컴퓨터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코딩교육처럼 대학생들이 갖춰야 할 핵심역량들을 공부하는데 학점에 연연하는 것은 시대와 맞지 않다"며 "성적에 매몰돼 암기중심으로 고착돼 있는 교육 풍토를 유연하게 바꿔야 할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대 모든 학생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학문의 기초 과정'은 글쓰기 외국어 컴퓨터 등 5개 영역에서 153개 과목이 편성돼 있다. 타국의 언어와 문화를 익히는 외국어 과목부터 과학 지식을 배우는 수업까지 학생들의 일반지식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우는 과목들이다.
그러나 실상은 지적호기심 대신 '학점경쟁'이 난무하는 전쟁터다.
현행 상대평가 제도에서는 학생들의 절대적 학업 성취도와 상관없이 20~30%만이 A학점 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는 30~50%의 학생에게 의무적으로 C학점 이하의 성적을 부여해야 한다. 컴퓨터공학부의 한 교수는 "학생들이 워낙 학점에 민감하다 보니 성실하지 않은 학생이 없을 정도인데 현행 시스템상 다수에게 C이하 학점을 줘야 하기 때문에 결국 정량적 평가가 될 때가 많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경영대 재학생 김 모씨(25)는 "학점 따기 쉬운 과목과 교수를 찾아 수강신청을 하는 사람이 대다수"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난이도가 높거나 학점을 짜게 준다고 알려진 교수들의 수업들은 수강인원이 적어 학기초 폐강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4차산업시대의 필수 언어인 컴퓨터 코딩 과목의 경우 "학점 받기가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문과 계열 학생들의 기피 과목이 됐다. 서울대는 내년 1학기 코딩 수업을 필수 교양과목으로 신설하고 이를 졸업요건에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사물인터넷·인공지능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빅데이터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도 최우선적으로 합·불 평가방식을 도입하겠다는 게 관계들 전언이다.
교수들은 새로운 평가 제도에 대해 학생들의 학문적 열정과 자율성을 높여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중어중문학과의 한 교수는 "학점에 대한 부담이 덜어지면 기본적인 학습 수준도 높아질 것"이라며 "실제 회화와 상관없이 학생들의 등급을 나누기 위해
반면 일부 교수들 사이에선 "상대 평가에 사용되는 세부 지표를 없애면 성적 평가의 객관성이 사라진다"며 "오히려 학업 성취도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염려 목소리도 나온다.
[황순민 기자 / 양연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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