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출범 초기부터 헛발질을 하고 있다. 당초 정부가 밝혔던 시민 배심원단에 의한 영구 중단 또는 공사 재개 결정이 아닌 350여 명의 공론조사 참여자 의견을 수렴한 합의안을 만들어 정부에 권고하는 방식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공론화 방식에 대해 말이 바뀌면서 공론화위는 출범 초기부터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 특히 공론화위가 합의안을 만들어 정부에 권고하면 정부가 최종 결정을 하게 되는 방식이라 이미 답이 정해진 공론화 과정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는 지적이다.
이희진 공론화위 대변인은 27일 2차 회의 후 가진 브리핑에서 "공론조사는 찬반 의견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공론조사 참여자의 의견 변화 과정을 조사하고 일정한 합의안을 만들어 정부에 권고하는 방식"이라고 밝혔다. 이는 공론화위 출범 당시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이 "시민 배심원단 방식을 통해 결정된 안이 나오면 이를 정부가 전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대변인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많은 주제에 대해 많은 내용을 알게 되고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나중에 어떻게 바뀌는지 등 자세한 얘기를 (정부에) 보고하면 결정권자가 최종 결정하는 방식이 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공론화위 입장대로라면 정부는 석달 뒤 신고리 5·6호기에 대한 복잡·다양한 의견이 담긴 보고서를 손에 들게 된다. 결정을 내려준다던 시민 배심원단은 공론화위 출범 4일 만에 사라지고 결정의 칼자루는 정부가 쥐게 된 셈이다.
이에 대해 국내 원자력계 최고 원로인 이창건 원자력문화진흥원장은 "공론화위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정부에 권고안을 제시하는 수준으로 스스로 역할을 제한한 것"이라며 "공론화위가 나서서 정부에게 탈원전 멍석을 깔아주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정부는 지난달 27일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일시 중단한 이후 한 달 동안 공론조사 개념조차 혼동한 채 허송세월한 셈이 됐다. 공론화위가 2차 회의에서 정부의 기존 계획을 뒤집은 것은 국가 중대사안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과 반대 여론 등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원전에 대한 배경지식과 파급 효과 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비전문가의 손에 원전 운명을 맡긴다는 지적이 쏟아지면서 공론화위가 출범 초기부터 발을 빼는 모양새다.
공론화위는 우선 1차 여론조사에서 지역·성별·연령을 '층'으로 고려해 표본을 2만명 내외로 뽑은 뒤 휴대전화와 집전화를 혼합 사용해 여론조사를 할 계획이다. 응답자 중에서 실제 공론조사에 참여하는 목표 참여자수를 350명 내외로 선정한 뒤 이들을 중심으로 의견 변화 과정을 조사하고, 합의안을 도출하겠다는 방침이다.
신고리 5·6호기 운명이 걸린 90일 간의 공론화 기간이 이미 시작됐는데 공론화위가 조사 방법에 대한 원점 재검토에 들어가면서 조사기간이 늘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당장 1차 여론조사를 위해서는 인구통계적 특성에 대한 가중치를 결정해야 하고, 2만명 규모의 여론조사를 진행할 수 있는 업체도 선정해야 한다. 또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여부에 대한 문항 외에도 탈원전 정책에 대한 의견, 공론조사에 참석 가능한지 등 문항을 포함할 것인지 여부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일각에서는 응답률 5% 수준의 유·무선전화 조사 방식으로 표본 2만명의 응답을 얻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단순 계산으로도 응답을 얻기 위해
한편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는 탈원전 이슈에 대해 공론화위가 합의안을 이끌어 내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여 3개월에 한정된 공론조사가 장기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고재만 기자 / 석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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