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살충제 계란이 추가로 검출된 강원도 철원의 A 농장. 1만5000수 정도 들어가는 사육장 3동의 문이 굳게 닫힌 가운데 산란을 분류하는 공장에서만 직원 2명이 기계로 알을 분류하고 있었다. 농장주 부인 B씨는 "철원군청에서 계란을 모두 폐기하라고 해 곧 폐기될 계란"이라고 말했다.
농장주 부부는 살충제 계란이 검출된데 대해 "무슨 약인지 알았다면 절대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억울함을 내비쳤다. 농장주 C씨는 "날씨가 따듯해 지면 이가 많이 늘어나는데 초기에 잡지 않으면 제압이 어렵다"면서 "포천 시내 가축약품판매상으로부터 구입한 20리터를 물에 희석해 1만5000수 정도에 한차례 뿌렸다"고 말했다. "농약 살포 후 이가 감소 하는 등 효과는 좋았다"고 했다.
살충제 계란 파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산란계 농장주들의 한결같은 항변은 A농장과 같이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일경제가 17일 이번에 문제가 된 '피프로닐' 제품 뒷면에 표기된 취급설명서를 확보해 살펴보니 이런 농장주들의 변명이 무색했다.
'리전트' '리베로' 등 시중에 판매되는 피프로닐 살충제 제품의 앞면과 뒷면 사용 설명서를 비롯해 판매회사의 홈페이지 제품 소개에는 제품의 정확한 용도가 벼농사용으로 벼멸구와 이화명나방, 흑명나방 등 저항력이 강한 병해충을 집중적으로 박멸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특히 앞면에는 '조류'에 사용하지 말라고 그림으로 표기되어 있고 뒷면에도 "야생조류·생물에 피해를 줄 수 있으므로 사용에 주의하라"는 경고문구도 등장한다. 애초부터 닭에 사용이 부적절하다는 건 누가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최대 60일까지 잔존하는 강한 독성 때문에 용도 그대로 벼·감자 등 작물에 사용할때도 1회, 수확 30일 전까지 3회 이내로 사용 시기와 횟수를 제한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파종 이후나 수확 이후 독성이 벼에 잔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 무분별한 피프로닐 사용은 18년 전 국내 양봉 농가에도 큰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지난 1999년5~6월 사이 부석면·인지면 일대 양봉농가 83가구의 꿀벌(1081통)이 집단 폐사하자 서산시는 이 일대 꽃과 꿀벌사체, 벌통주변 토양 등을 시료 채취해 농업과학기술원에 검사를 의뢰했고 그 결과 해충제인 피프로닐 성분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당시 현대건설은 서산시 AB지구 간척 농경지에 이 농약을 사용해 병해충 항공방제를 실시한 바 있다. 제품 앞면에는 조류에 사용금지 그림처럼 '벌에 사용 금지' 그림이 있고 제품 특징에 대한 설명에서도 "꿀벌에 독성이 강하므로 꽃이 피어있는 동안이나 꿀벌이 왕성한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살포하지 말라"는 주의사항이 있음에도 이를 무시한 셈이다.
이에 따라 양계농가들이 농업용 살충제의 위험성을 몰랐다는 항변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정상희 호서대 임상병리학과 교수는 "양계농가에서 무허가 약품을 구입하면서 처방이나 허가 등 관리당국의 확인절차를 제대로 거쳤는지 불투명하다"며 "농민들이 피프로닐 농약 사용 시 유의해야 할 사항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지도 이번 기회에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철원의
A농장주 부부는 취재진에게 "약 구매 당시 어떤 종류의 약이고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고 그저 (농약판매상에서) 좋다고 하니까 썼다"고 말했다. 용도를 무시한 농약 판매상들의 무분별한 판매도 점검해야 한다는 얘기다.
[철원 = 지홍구 기자 / 서울 = 양연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