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년 반 전이었던 2011년 겨울, 김남일은 장고를 거듭했다. 러시아 생활을 청산하고 다음 행선지를 고민하던 무렵이다. 일본과 중국에서 조건이 꽤 좋은 제안들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가족과 함께 한국에서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그게 또 망설여졌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정점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시점에서의 컴백이라 행여 팬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진 않을까, 그런 빛바랜 기억으로 김남일의 축구인생이 정리되는 건 아닐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남자’ 김남일도 한숨을 내쉬면서 고민했던 기억이다. 그랬던 김남일이 1년 반 만에 활짝 웃었다. 3년 만에 대표팀 재발탁, 걱정은 기우였다.
지난 16일 대표팀 명단 발표 직후 그는 “과연 내가 다시 대표팀에 들어갈 수 있을까, 평소에 생각은 했었지만 이것이 정말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면서 “대표팀에 처음 발탁됐을 때보다도 설레고 긴장됐다. 기분이 참 묘하다”는 말로 소감을 전한 바 있다.
그리고 열흘 뒤, 대표팀 최고참 김남일은 20명 소집인원 중 가장 빠른 오전 9시에 파주에 들어왔다. 다시 찾은 파주의 공기를 맡으면서 몸도 마음도 스스로 다잡는 시간으로 활용했다는 뜻을 전했다. 김남일의 A매치 데뷔전은 199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에서였다. 그토록 오래도록 대표팀 붉은 유니폼과 함께한 김남일이 이렇게 설렌다는 게 꽤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유가 있었다. 간절히 품었던 꿈이기 때문이다.
김남일의 대표팀 마지막 경기는 2010남아공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이던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였다. 그 경기에서 김남일은 박스 안에서의 수비도중 실수로 파울을 범해 페널티킥을 내줬다. 다행히 비기면서 조별예선을 통과했으나 김남일은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 나오지 못했다. 결국 김남일의 대표팀 마지막 기억은 나이지리아전의 실수였다. 그것이 마지막 잔상이었다.
김남일은 “그때를 어떻게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있겠는가. 사람들 역시 마지막 모습만 기억하는 법이다. 정말 다시 기회를 잡고 싶었다. 꿈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를 악물고 뛰었던 것이다”는 말로 아무도 몰랐던 간절함을 고백했다.
2002월드컵의 영웅 이미지는 차치하더라도 10년을 훌쩍 넘기는 세월 동안 한국축구 중원의 핵으로 오랫동안 봉사했던 김남일은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은 축구선수다. 하지만 언급한 그 실수로 졸지에 역적이 되고 말았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자칫 그것이 마지막 뒷모습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터프가이’이자 필드를 빨아드리던 ‘진공청소기’에 대한 기억은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표팀 발탁이라는 것은 자신만 최선을 다한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뽑히는 것은 뽑아주는 자가 있어야한다. 누군가는 나이가 많다며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고, 누군가는 과거의 인물에 연연한다고 지적했지만 최강희 감독의 소신은 김남일의 실력을 믿었다. 그 신념과 함께 김남일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최강희 감독은 나아가 김남일의 꿈을 더 부추기고 있었다.
김남일은 “파주에 들어와서 감독님을 만났는데 특별한 말씀은 하지 않겠다고 하시더라. 부담을 줄 수 있으니 편하게 하라고 했다. 그 믿음이 더 감동적이었다”면서 “그리고 나가려는데 한 마디 더하시더라. 계속 도전하라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주셨다.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는 말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이어 “사실 나도 알고 있다. 예전과 똑같은 몸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덮어놓고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고 하는데 최 감독님처럼 말씀해주시면 정말 없던 힘도 난다. 그런 거 아닌가. 사람은 말 한 마디로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 아닌가”는 이야기를 전했다. 최강희 감독의 말 한 마디가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김남일이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포기하지 않고 꿈을 키웠기 때문이다. 36살이라는 숫자와 상관없이 능력이 당당하면 국가를 대표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김남일이 보여줬다. 후배들이 좇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줬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발탁이다. 그 희망의 빛이 더 밝기 위해서는 레바논전을 시작으로 한 최종예선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최강희 감독의 말마따나 계속 도전해야한다.
누군가는 콧방귀 뀌고 말았을 꿈을 소중하게 지켜보고 옆에서 부추기고 있는 최강희 감독의 시선과 심지가 없었다면 또 지금의 그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간절히 바라고 준비하면 그것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꿈을 키워온 자와 그 꿈을 부추기는 자가 만났다. 이들의 호흡이 부디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 그래야 지켜보는 이들이 꿈을 품을 맛이 난다. 그래야 살맛이 난다.
[MK스포츠 축구팀장 lastuncle@mae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