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김원익 기자]
‘잠실 홈런왕’ 그리고 ‘터미네이터’ 김상호. 90년대 OB베어스의 팬들은 호쾌한 스윙으로 까마득한 상공까지 홈런을 날렸던 홈런왕 김상호를 잊지 못할 것이다. ‘불사조’ 박철순, ‘미스터 OB’ 김형석과 함께 OB의 두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선물해준 그였다. 특히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첫 홈런왕의 영예는 바로 김상호의 것이었는데, 1995년 홈런왕·타점왕·MVP를 석권하며 눈부신 OB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제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사업가로서, 유소년 야구와 사회인 야구 발전에 앞장서는 야구교실의 원장으로 변신한 ‘전설’ 김상호를 MK스포츠가 만났다.
1995년 OB 베어스의 우승을 이끌었던 ‘터미네이터’ 홈런왕 김상호. 이제 사업가이자 야구교실 ‘팀 베이스’의 원장으로 새 삶을 살고 있다. 사진=김영구 기자 |
영광이고 감사하다. 선수 은퇴 이후 사업가로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태릉선수촌에 태권도 도복을 공급하는 사업도 했고 외식 사업도 했다. 지금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의류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인천 부평구에서 김상호 야구교실 ‘팀 베이스’를 운영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쉰을 바라보는 여전히 몸매가 탄탄하다. 현역 시절 ‘터미네이터, 잠실 홈런왕, 배트맨’등 별명이 많았는데 어떤 별명이 가장 마음에 드는가
또 고맙다(웃음). 팬들이 제일 좋아했던 별명은 ‘터미네이터’ 였지만 아무래도 내 입장에서는 최초의 기록을 남겨준 ‘잠실 홈런왕’이라는 수식어가 더 좋다. 그 당시에는 구장이 작은 지역 출신들의 홈런왕이 득세하던 시기였기에 더 자부심이 남는다.
홈런왕 레이스도 치열했다. 가장 큰 규모의 잠실구장을 사용하면서 쏘아올린 25개의 홈런도 홈런이었지만 101타점을 기록하며 팀에 공헌했다. 사진은 김상호의 홈런왕 수상을 확신하는 당시 신문 기사. 사진=김상호 제공 |
정말 그랬다. 잊지 못할 한 해였다. 시즌 전만 해도 전문가들 모두가 OB를 최하위로 꼽았다. 지난해 7위를 한데다 초유의 사건이 터졌고, 전력 보강도 없었으니까 이해는 하지만 단 1명도 예외없이 8위였다. 7위로 예상한 이들도 없었다. 그것 때문에 이를 악물고 했다. 시즌 종료 몇 경기를 앞두고까지 우승팀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한 우승 레이스가 진행됐는데, 8월까지 LG에게 6경기차로 뒤진 2위였다. 그러다 9월에 승률 7할5푼을 기록했다. 연승을 하면서 분위기를 타는데 덜컥 마지막에 1위로 올라섰다. 0.5경기차로 대역전극을 만들었다. 더욱이 그 상대가 서울 라이벌 LG였으니까 기쁨이 2배였다. LG가 9월에 자멸한 사이 우리가 승승장구했다. 결국 한국시리즈서도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롯데를 꺾고 우승하면서 모든 걸 다 일궈낸 시즌이었다. OB 팀으로서는 12년만의 우승이었고, 내게는 첫 우승이라 정말 기뻤다. 그리고 내가 그 우승에 기여했기에 더욱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때 OB의 야구는 어땠나
끈끈했다. 한 번 물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팀이기도 했다. 노장과 신인이 하나가 된 진짜 ‘팀’으로서 야구를 했다. 사실 우리는 그때 주목받는 선수들이 없는 ‘언더독’이었다. 하지만 신구조화가 완벽했던 것 같다. 두각을 나타낸 선수들이 많았다. ‘불사조’ 박철순 형님을 중심으로 김상진, 권명철, 김민호, 장원진, 김종석, 심정수, 김형석, 임형석, 이용호 등 손으로 꼽을 수도 없이 많은 선수들 하나하나가 최선을 다했다. 노장과 신인이 조화를 이뤄 ‘한 번 일을 내보자’는 파이팅이 늘 더그아웃에 흘렀다. 정말 진짜 야구를 했던 것 같다.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페넌트레이스 MVP를 수상한 김상호가 환호하고 있다. 사진=김상호 제공 |
개인적으로도 최고의 시즌이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재능과 파워는 인정받았지만 꽃을 피워내지는 못했다. 좋은 타자는 아니었다. 그 당시에 김인식 감독님을 만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김인식 감독님은 내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셨다. 내 스윙을 할 수 있게 가장 많이 지지해주신 분이었다. 지도자의 꾸준한 믿음과 신뢰가 최고의 한해를 보낼 수 있게 해줬다.
(김상호는 이 해 타율 2할7푼2리 25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잠실구장을 사용하는 최초의 홈런왕이자, 1991년·1992년 장종훈에 이어 역대 3번째 100타점 이상을 기록하며 타점왕이 됐다. 또 압도적인 표차로 20승 투수 이상훈을 제치고 MVP까지 석권했다)
김상호는 공을 쪼개는 듯 호쾌한 어퍼스윙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특히 팬들은 김상호의 타석에서는 하늘 높이 떠오른 타구를 바라보느라고 목이 아플 정도였다. 사진=김상호 제공 |
다 김인식 감독님의 공이다. 1995년 김인식 감독님이 부임하시기 전까지는 그런 스윙을 하지 못했다. 당시에 그런 스윙을 하면 정말 혼났다(웃음). 그런데 김 감독님이 오시고 내게 이야기를 하셨다. ‘넌 우리 팀의 4번타자다. 니 재능을 살려서 홈런을 쳐야 된다. 이제 땅볼 치면 죽는다. 가서 맘껏 돌려’라고. 그 말이 정말 내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힘이 됐다. 한 번은 1사 만루 상황에서 유격수와 3루수 사이를 꿰뚫는 안타를 쳐 2타점을 올리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마자 엄청나게 혼난 적이 있었다. 감독님의 뜻은 그랬다. 야구는 확률의 경기니까 땅볼 타구가 촘촘한 내야 수비를 뚫고 안타가 될 확률은 적고, 이번에는 운이 좋아 안타가 됐지만 만약 야수에게 잡혀 병살이 됐다면 모두를 망친 결과라는 것이다. 4번 타자의 역할은 그 상황에서 무조건 공을 띄웠어야 하는 것이 맞다는 말씀이었다. 내게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를 믿어주셨다. 내 야구와 스윙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였다.
1995년 김상호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 원동력은 김인식 감독의 믿음이었다. 사진=김영구 기자 |
운이 좋았고(웃음), (이) 상훈이가 스스로 무너진 영향이 컸다. 사실 지금은 그런 것이 없어졌지만 그때만 해도 MVP를 수상하기 위해서 로비를 많이 했다. 홍보팀의 직원들이 서울과 지역의 언론사를 돌면서 한 해 동안 감사의 의미에 더해 투표에서 자신들의 팀을 잘 봐달라고 밥을 사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당시 OB 프런트였던 구경백 일구회 사무총장이 투표 직전 내게 “최선을 다했지만 미안하다”고 하더라.
결국 김상호는 그 해 20승을 기록한 이상훈을 제치고 MVP가 됐다. 그 해 최고의 투수와 최고의 타자의 운명은 그렇게 엇갈렸다. 사진=김상호 제공 |
우승을 못한 LG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물량공세를 펼쳤으니까 기대를 하지 말라는 귀띔이었다. LG가 선물을 제작해서 언론사와 방송사에 돌렸다는 소문이 쫙 돌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내가 엄청난 표차로 MVP가 됐다. 그때 정규 시즌 직후가 아닌 포스트시즌 이후에 투표가 진행됐는데 (이)상훈이가 9월 부진하고 포스트시즌서도 롯데에게 난타를 당하면서 스스로 무너진 영향이 컸다. 정규시즌 우승 프리미엄에 홈런 타점왕 석권, 잠실 홈런왕이라는 타이틀이 컸던 것 같다, 아무튼 운이 좋았다.
사실 1995년을 앞두고 야구가 더 절실했을 이유가 있었다.
그랬다. 정말 간절하게 야구를 잘 해야했고,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해서 이를 악물고 겨울동안 훈련했다. 정말 그렇게 훈련을 많이 한 해는 없었던 것 같다.
中에서 계속
세월이 성큼 다가왔지만 열정은 여전했다. 사진=김영구 기자 |
[one@mae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