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김원익 기자]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외국인 투수 레다메스 리즈의 사구는 정황상 고의는 아니다. 하지만 상황을 예견하고도 그 결과의 발생을 어쩔 수 없다고 인용(認容)한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에 가깝다. 리즈로서는 사구를 생존 전략으로 사용하던 중 나온 부작용. 하지만 상대 선수의 몸에 위해를 가하거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인식을 망각할 경우 미필적 고의는 반복되고, 결국에는 심각한 부상을 불러올 수 있다.
리즈는 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13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해 6이닝 3피안타(1홈런) 3볼넷 2사구 7탈삼진 2실점 호투를 펼쳐 5-4 승리를 이끌고 9승(11패)을 달성했다. 하지만 배영섭의 머리를 직격한 사구 이후의 세리머니, 추가 사구와 미소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LG측은 리즈에게 절대 고의성이 없다는 뜻을 강변하고 있다. 관계자는 “어제 경기서도 마운드서 내려온 리즈가 통역을 통해 삼성쪽에 배영섭의 상태를 물어봐달라고 말하며 걱정했다. 큰 부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심했다. 절대 고의성이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리즈의 사구는 미필적 고의다. 사진=MK스포츠 DB |
사구보다 세리머니가 더 문제였다. 리즈는 6회 무사 1루에서 배영섭의 헬멧을 강타하는 사구를 던졌다. 151km 강속구에 헬멧 귀쪽 부분을 직격 당한 배영섭은 그 자리에서 쓰러진 이후 앰뷸런스를 통해 올림픽병원으로 호송됐다. 자칫하면 선수생명을 위협할 만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했어도 여기까지는 야구의 영역에서는 충분히 용인될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사건이 이후에 터졌다. 리즈는 이후 연속 세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치고 주먹을 쥔 채로 마운드에서 펄쩍 뛰어오르는 격정적인 세리머니를 펼쳤다. 이어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던 중 다시 주먹을 치켜 올리며 포효했다.
방금 전 동료가 치명적인 사구를 맞고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간 상황에서 이런 세리머니를 펼칠 수 있을까. "리즈가 배영섭을 걱정했다"는 구단 관계자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상대 팀을 떠나 함께 야구를 하는 동업자로서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최소한의 예의를 망각한 행동이었다.
이후의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7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리즈는 박석민의 옆구리를 다시 맞혔다. 시즌 20번째 사구. 박석민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리즈는 곧바로 손을 들어 고의가 아니라는 것을 표현했다. 박근영 구심은 리즈에게 퇴장을 내리는 대신 LG 벤치에 주의를 줬고, 리즈는 이동현과 교체됐다. 이후 리즈는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미소를 짓고 더그아웃에 들어가면서 삼성 더그아웃과 팬들을 한 번 더 자극했다.
사실 기쁨보다는 유감이 우선해야할 상황이었다. 미국에서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리즈라고 하더라도 머리에 사구를 맞은 경우는 아주 위험천만하고 특수한 사례에 속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캡틴’ 이병규는 경기 종료 후 삼성의 주장 최형우에게 사정을 설명하기도 했다. 김기태 감독도 경기 종료 후 “배영섭의 부상이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유감을 표했지만 당사자는 편안한 얼굴로 수훈선수 인터뷰를 마쳤다.
이어 경기 종료 후 리즈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배영섭에게 미안하다. 괜찮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다행이다”라며 뒤늦게 유감을 표현했다.
그렇다면 리즈의 이날 사구는 고의였을까. 사실 그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이는 리즈 자신 뿐이다. 하지만 리즈의 올 시즌 사구, 특히 최근 사구에는 의도하지 않은 불의의 사고라고 보기에 어려운 미필적 고의의 단서들이 있다.
▲ 홈런 혹은 대활약 이후 다음 타석 사구
최근 리즈에게 사구를 맞은 선수들 중 3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리즈에게 사구를 맞기 직전 경기나 당일 경기서 홈런을 때린 우연이 겹쳐졌다는 점이다. 3명의 타자가 리즈 상대 직전 경기나 사구 전 타석에서 홈런을 친 이후 다음 타석에서 사구를 맞는 희박한 확률이 리즈의 사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장성호는 7월 16일 LG전 7회 리즈를 상대로 스리런홈런을 날려 경기를 3-3 원점으로 돌려, 리즈의 승리 투수 자격을 날렸다. 장성호는 바로 직후 리즈를 상대한 8월 9일 LG전 첫 타석에서 다리에 159km 직구를 맞았다. 리즈의 시즌 14호 사구였다.
리즈의 17호와 18호 사구는 최정을 상대로 나왔다. 최정은 8월 22일 리즈를 상대로 홈런 포함 4타수 2안타 2타점 활약을 펼친 이후 바로 다음 리즈를 상대한 9월 3일 경기 첫 타석에서 허리쪽에 155km 직구를 맞았다. 두 번째 타석에서 범타로 물러난 최정은 세 번째 타석에서 1타점 적시타를 때렸다. 그리고 이어 네 번째 타석에서 6구째 머리로 향하는 볼을 피한 이후 7구째 허리에 156km 직구를 맞았다. 배영섭은 8일 LG전 첫 타석에서 선제타자 솔로홈런을 날린 이후, 두 번째 타석에서 볼넷을 골랐다. 이어 6회 세 번째 타석에서 헬멧에 사구를 맞았다.
리즈가 올해 던진 2831구의 공 중 3개. 그 희박한 경우의 수의 공이 사구가 됐는데 직전 타석에서 홈런을 친 선수를 상대로 연이어 나왔다는 것은 극도로 희박한 확률이다. 동시에 리즈의 사구가 미필적 고의임을 증명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리즈는 한국 무대서 몸 쪽 위협구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변화구 제구가 좋지 않은 리즈로서는 몸 쪽 위협구가 변화구를 대체할 수 있는 하나의 생존전략인 것이다. 리즈로서는 몸 쪽에 바짝 붙는 공을 던져 타자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제구가 좋지 않은 리즈가 많은 사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의 리즈가 홈런을 허용한 타자들을 상대로 긴장하고 있기에 겹쳐진 우연이라는 주장도 있다.
리즈는 3일 17호와 18호 사구를 연이어 허용한 이후 바로 다음 등판인 8일 경기서 19호와 20호 사구를 기록했다. 자신의 사구가 타자들을 맞힐 수 있는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할 리 없다. 몸 쪽으로 직구를 바짝 붙일 경우 사구가 될 위험을 알고 있지만 그 결과의
핵심은 결국 리즈가 사구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리즈는 사실상 사구를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리즈가 사구를 피해야할 부작용으로 생각하지 않고, 타자를 위협할 하나의 무기로 인식하고 있다면 이는 비극의 단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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