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플레이는 골프를 죽이는 행위"라고 했던 옛 세계 1위 루크 도널드(잉글랜드). 지난 해 초까지만 해도 세계랭킹 2위를 유지했던 그는 현재 17위까지 곤두박질쳤다.
새해 초부터 "어린 선수들이 우리를 보고 배울까 두렵다"며 슬로 플레이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지만 남의 플레이 속도만 신경 쓰는지 정작 자신의 성적은 좋아지지 않고 있다.
샷 빠르기로 1, 2위를 다투는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와 리키 파울러(미국)의 지난 해 성적은 처참하다. 매킬로이는 세계랭킹 1위에서 6위까지 떨어졌고, 파울러도 31위에서 40위로 밀렸다.
몇 년 전 골프닷컴(www.golf.com)이 아널드파머 인비테이셔널 때 선수 45명의 실제 샷 시간을 초시계로 측정한 결과, 파울러가 샷 한번 하는데 16초가 걸려 가장 빠른 선수로 뽑혔고 조난타 베가스(베네수엘라)도 21초로 무척 빨랐다. 매킬로이도 어드레스에 들어가면 주저 없이 샷을 하는 선수로 유명하다. 2011년 봅 호프 클래식에서 우승했던 베가스는 현재 세계랭킹이 606위로 추락한 상태다.
한마디로 '속사포 골퍼 수난시대'다.
당시 50초를 기록해 느림보 골퍼 중 한명으로 뽑혔던 재미동포 케빈 나는 슬로 플레이로 곤욕을 치른 뒤 프리샷 루틴을 빠르게 하는 방법으로 바꿨다가 역시 성적이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다. 케빈 나는 작년 초 66위에서 현재 233위로 추락했다.
반면 슬로 플레이 수준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느린 편에 속하는 타이거 우즈와 필 미켈슨(이상 미국)은 현재 세계랭킹 각 1위와 5위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우즈는 바람 방향을 재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이고 퍼팅 라인을 읽는 데도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켈슨은 거리를 놓고 캐디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악명 높다.
옛 골프 황제인 잭 니클라우스도 전성기 시절 느린 플레이로 도마 위에 자주 올랐던 선수다.
로베르토 드 빈센조라는 선수는 언젠가 저녁 식사가 어땠냐는 질문에 "잭 니클라우스 같았다. 아주 좋았고, 아주 느렸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니클라우스는 전성기 시절 여섯 방향에서 퍼팅 라인을 읽는 것으로 유명했다. 더 큰 문제는 니클라우스를 본 받으려고 따라 하는 골퍼들이 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1995년 늑장 플레이 때문에 벌타를 받았던 글렌 데이는 수년 전 니클라우스와 만난 자리에서 "몇달 동안 당신의 플레이를 따라했는데 벌금을 맞았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골프 전설 중 한명인 벤 호건도 악명 높은 슬로 플레이어였다. PGA투어 최다승 기록을 갖고 있는 샘 스니드는 전에 "호건의 퍼팅을 기다리는 동안 시가 한 대를 다 피울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
미국골프재단은 매년 미국골프지표를 조사한다. 여러 항목 중 '코스에서 가장 짜증나는 일은?'이라는 설문에 50% 이상이 슬로 플레이를 꼽는다고 한다.
'속사포 골퍼'는 분명 환영 받지만 성적은 오히려 빠를수록 나빠지는 것은 골프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오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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