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편에 이어
빼빼하게 말랐던 양준혁의 체격은 군대에서 좋아지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체중을 불리려 노력해도 안되던 것이 꾸준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양이 증가했던 것. 군대 시절의 노력으로 양준혁은 중장거리 타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1992년 군대 동료들과 함께한 양준혁. 왼쪽은 박치왕 현 상무야구단 감독.
1993년 삼성에 입단하게 된 양준혁은 역대 타자 최고액인 계약금 1억100만 원, 연봉 1800만원을 받았다. 신인임에도 수위타자상(타율 0.341), 최고출루율상(0.436), 최고장타율상(0.598) 등 3관왕을 휩쓸며 신인왕에 올랐다. 양준혁은 아마추어 때의 금속배트보다 신인 시절의 나무배트가 더 잘 맞았다고 회상했다. 신인시절의 양준혁이 쌍방울의 홈구장이었던 전주구장에서 타격연습을 하고 있다.
1993년 국내 프로야구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양준혁은 루키시즌 이후 당시 연예계 신인으로 주가를 올리던 탤런트 고소영과 ‘신인VS신인’ 콘셉트의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프로 2년차의 양준혁은 팀내 안팎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찌뿌둥한 자세, 8자걸음걸이 등으로 좋지 않은 이미지도 심어주게 된다. 대학시절 갑작스레 큰 키의 영향으로 어깨는 쳐지고 자세는 건들건들해지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해를 넘겨 1995년의 양준혁을 무관에 머물게 만든다. 하지만 타율은 3할1푼3리를 유지했다. 1994년 잠실야구장에서의 양준혁, 오른쪽에 동봉철 KBO 육성위원도 보인다.
하지만 양준혁은 1996년 전성기의 서막을 알리게 된다. 주변을 의식하기 보다 자신의 스타일을 살리기로 마음먹은 것. 잠시 주춤했던 1995년을 잘 넘긴 양준혁은 1996년 28홈런 23도루를 기록하며 20-20클럽에 가입했고, 프로야구 통산 6번째의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양준혁은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3회 우승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1996년 올스타전에서는 최장거리상에 만족해야 했다. 당시 홈런레이스 우승자는 LG 심재학.
1999년 해태 임창용과 3:1 현금 트레이드 된 양준혁은 야구장 밖에서는 강한 불만을 표하기도 했으나 경기장 내에서는 여전한 경기력을 뽐냈다. 타율 3할2푼3리 32홈런 105타점 21도루를 기록, 개인 통산 3번째 20-20클럽에 가입했다. 1999년 7월 29일 해태 유니폼을 입고 20-20클럽 가입을 준비하는 양준혁.
2001년 또다시 LG로 트레이드 된 양준혁은 2002년 FA 자격을 얻을 때까지 2년간 LG에서 활약한다. 2001년의 타율은 3할5푼5리로 타격 1위에 올랐다. 이때도 양준혁의 1루를 향한 집념은 식지 않았다.
2003년 FA를 통해 삼성으로 다시 복귀한 양준혁은 이후 2010년 은퇴할 때까지 삼성맨으로 활약했다. 은퇴 이후에는 양준혁야구재단을 만들어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지난 2013년 12월 대구시와 함께한 양준혁 야구 캠프에 참석한 양준혁.
양준혁은 스스로 뼛속 깊이 야구인이라고 칭했다. 야구와 자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
임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켰다. 그리고 이같은 생각은 남은 인생동안 계속 될 것이라고 전했다. 현재 재단을 통해 어린 야구유망주들을 키우고 있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양준혁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국 야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사진=한희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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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양준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