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매카트니는 “인종차별보다 나쁜 것이 음악의 장르를 차별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남들을 평가하고, 비교하고, 차별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지 알면서도.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용필과 나훈아가 비교대상이 될까? 이들은 자신의 장르에서 최고 경지에 올랐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아티스트’다.
오승환이 올 시즌부터 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에서 마무리 투수로 뛴다. 한국 무대에서 최다 세이브 기록을 갈아 치운 오승환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한국 최고 마무리 투수가 일본에선 어느 정도 성적을 낼 것인지, 과연 일본 무대도 평정할 것인지 등등.
그리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선동열 KIA 타이거즈 감독에게 향한다. 오승환과 선동열 감독을 비교하는 것이다. 오승환이 한신행을 결정한 직후부터 네티즌과 야구 관련 사이트에선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일본무대에 진출한 선동열 감독과 비교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이들은 오승환의 현재 구위와 주무기를 선동열 감독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올 시즌 예상 기록을 점친다. 그러면서 은근히 어느 한쪽을 깎아 내린다.
결론은 이 비교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오승환이 선동열 이상 가는 성적을 거두길 바란다. 하지만 시대와 여건을 배제한 단순 비교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선동열 감독이 일본으로 간 것이 1996년. 18년 전이다. 당시 한국 프로야구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였다. 한-일 슈퍼게임을 통해 드러난 한국과 일본 야구의 차이는 냉정하게 말해 초등학생과 고등학생 정도였다. 한국 프로야구 출신으로 해외 무대를 노크한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던 시절이었다.
선수의 훈련방식과 몸 관리 등 세부적인 부분으로 들어가면 그 격차는 더욱 커진다. 1990년대 중반 선동열 감독이 몸담았던 해태 타이거즈는 국내 구단 가운데서도 훈련여건이 가장 열악했다. 웨이트 시설이라곤 락커룸 한 켠에 기구 몇 개 갖다 논 게 전부였다. 실내 훈련장도 없었다. 전문적인 트레이너도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선동열 감독은 세 시즌에 걸쳐 0점대 평균자책점(규정이닝 통과)을 기록했다. 그리고 일본무대 문을 두드렸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4년 동안 일본에서 거둔 성적은 162경기에 등판해 10승4패 98세이브, 평균자책점 2.70이었다. 마무리 투수로 197이닝을 던져 160개의 안타를 맞았고, 볼넷은 55개 내줬다. 삼진은 228개를 잡아냈다. 첫 해인 1996년 일본 야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5승1패 3세이브, 펑균자책점 5.50을 기록한 것을 빼면 출중한 성적이다.
선동열 감독은 처음 일본야구를 접하면서 문화적 충격은 물론 훈련 시스템과 타자들의 성향 차이에서 오는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었다. 선동열 감독은 이 모든 어려움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고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섰다.
18년이 지났다. 한국야구는 일본야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실력이 급상승했다. 선동열 감독의 일본 진출 이후 미국과 일본의 선진 야구기술을 빠르게 받아 들여 우리 것으로 소화한 결과다. 한국에선 거구였던 선동열 감독이지만 주니치 드래곤즈 스프링캠프에 처음 합류해 일본 선수들의 몸집에 주눅이 들었다. 지금은 한국 선수들의 덩치가 더 크다.
1996년과 2014년을 비교하는 건 넌센스다. 같은 시대, 같은 무대에서
선동열 감독에겐 그 만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오승환에겐 그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오승환이 일본 무대에서도 승승장구 하기를 기대하면서 부디 선동열 감독의 업적이 폄하되는 일이 없길 바란다.
[매경닷컴 MK스포츠 편집국장 dhkim@mae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