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승민 전문기자] “안되겠구나 포기하려다가도 한 번씩 들어오는 공 하나의 매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지난해 NC 김경문 감독이 놓을 수 없었던 그 공은 9년전 당시 LG 스카우트였던 이효봉 XTM 해설위원이 잡고 싶었던 공이고, 한해 뒤 LG에 입단한 새내기 투수들 속에서 차명석 코치가 키우고 싶었던 공이다.
많은 이들이 알아보고 기다렸지만, 오랫동안 쉽게 볼 수 없었던 그 공. 올해 야구팬들은 실컷 봤다.
1군진입 2년만에 ‘빅3’에 올랐던 NC 마운드의 최강 셋업맨, 원종현(27)은 진해수(SK·75경기)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많은 73경기에 등판했던 투수니까.
2010년 봄 자비로 팔꿈치를 수술한 뒤 홀로 재활하고 훈련하던 원종현은 신생팀 NC의 비공개 트라이아웃을 거쳐 2012시즌 신고 선수로 입단하면서 프로 무대 재도전의 기회를 잡았다.
계산이 애매해진다. 프로 몇 년차? 어쨌든 원종현은 패기도, 각오도, 온전히 ‘신인’으로 올시즌을 뛰었다.
“올해 모든 구장에서 다 던져본 것"을 첫째로 자랑할 만큼, 그는 첫 마운드의 소중함을 아는 투수다.
“절박함은 있었지만, 솔직히 성공에 대한 확신은 없었어요.”
군산상고 시절, 동기 차우찬(삼성)의 ‘독기’를 닮고 싶었던 원종현은 순둥순둥한 성격이다. 좋은 공과 자질을 갖고도 일찍 성공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에게 오기와 근성이 부족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신 그에게는 참을성이 있었다. ‘확신’이 없는 채로 만 3년의 ‘홀로던지기’를 버텨냈다.
‘무적(無籍)’ 원종현은 무슨 일까지 해봤을까.
“아침 인력시장에 나가 일용직 일거리도 구해봤죠.”
비닐하우스를 짓는 일에 뽑혀가 삽질도 해봤고, 서울 삼성동 종합전시장의 박람회장 철거작업도 거들어봤다.
“먼지를 엄청 마시는 힘든 일이더라고요. 그래도 살갑게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은 어려운 성격이라, 노동일로 일당을 버는 게 속은 편했거든요.”
오버핸드스로 투수였던 원종현은 NC 최일언 투수코치의 조언을 받으며 지금의 스리쿼터 투구폼을 완성했다. 스피드를 조금 포기하더라도 부족했던 공의 회전을 늘리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팔각도와 손목 스냅에 관한 오랜 실험과 방황을 거친 그는 LG와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 잠실구장 전광판에 154km의 구속을 찍고 화제를 모을 만큼 토종 ‘속구파’ 마운드의 떠오르는 스타가 됐다.
“요즘 타자들이 스피드만으로는 절대 기죽지 않잖아요. 제구력을 더 키워야죠.”
타자를 향한 무기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숫자 ‘154’. 그러나 원종현 본인에게는 톡톡한 효과의 비타민이다.
“스피드가 잘 나오면 기분이 너무 좋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에게 진짜 필요했던 것은 그 당당한 자신감이다.
처음 주자들을 두고 릴리프 마운드에 섰을 때 그저 얼른 ‘들어가고 싶었다.’
“빨리 주자들을 처리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마음이 급했죠.”
올해 원종현의 가장 큰 성장은 ‘호흡’이다. 이제 그는 마운드에 올라 긴 숨을 쉴 수 있다. 빨리 끝내고 싶다는 조바심 대신, “지금 이 마운드의 주인은 나”라는 생각을 완성하면서 그가 던지지 않고서는 절대 시작하지 않는 승부, ‘원종현타임’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내년에도 NC의 셋업맨이다.
“요즘 확실한 필승조 한명 키우는 게 선발투수 발굴보다 어렵다”는 김경문 감독은 원종현에게 내년에도 그 자리를 맡길 계획이다.
어깨가 빨리 풀리는 편도 아니고 딱히 연투가 거뜬한 스타일도 아니지만, 원종현 역시 이 자리에서 ‘롱런’을 벼른다.
“어깨가 빨리 풀리는 편이 아니죠. 그런데 빨리 풀 필요가 없던 야구를 오래해서 일지도 몰라요. 이 자리에 더 어울리는 스타일로 몸을 만들어보려고요.”
김경문 감독이 보는 원종현은 “남 탓보다 자기 탓을 먼저 하는 선수”다. 늘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았던 것이 “결국 종현이가 성공한 비결”이라고 말한다.
원종현에게 LG를 물었더니 그를 포기했던 팀이 아니라 “열여덟살 나를 알아봐 줬던 팀”이라고 했다. 김 감독의 말뜻을 알 것 같다.
그에게는 아들이 LG 2군에서 기약없는 유망주 생활을 할 때도, 방출후 구리 자취방에서 홀로 운동을 계속할 때도, 늘 묵묵히 믿고 기다려준 부모가 있다.
4월의 첫날 NC의 홈 개막전에 아버지(원요안씨)를 초대했다. ‘내 아들은 프로야구 선수’라고 처음 말할 수 있던 날부터, 진짜 아들이 뛰는 프로팀 경기의 스탠드에 앉을 때까지 그의 아버지에게는 8년이 필요했다. 한점차의 타이트한 승부(KIA 1-0 NC) 탓에 그날 ‘신인’ 원종현은 데뷔하지 못했다.
“경기전 선수단 소개 때 인사하러 나온 거는 보셨으니까 좋아하셨죠.”
다시 6개월 뒤, 지난달 19일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야 드디어 그의 아버지는 NC의 5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원종현이 던진 공 3개를 볼 수 있었다.
↑ 사진=김영구 기자 |
그의 인생을 바꾼 두 번의 합격 통지.
LG로부터 처음 신인지명을 받았
“정말 순수하게 기뻤던 순간은 LG 지명 때였던 것 같습니다. 벅차고 기쁜 마음밖에 없었죠. 그런데 NC한테 전화를 받았을 때는... 기쁘기도 하면서, 뭔가 달랐어요. 울컥하더라고요.”
인생엔 단맛만 필요한 것이 아닐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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