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김원익 기자] 기록의 희생양이 아닌 야구인으로 정정당당하게 이승엽의 400홈런을 바라본 롯데 자이언츠는 참 멋졌다.
야구는 많은 이들이 함께 뛰는 단체 스포츠다. 위대한 기록을 세운 개인이 많은 이들의 도움을 언급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타자를 꺾어야 하는 투수는 경기장의 수많은 사람들 중 가장 고독한 존재다. 하지만 동시에 야수들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고 공을 던진다. 타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잘 치고 잘 잡고 잘 뛰더라도 투수의 도움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야구의 기록은 그래서 더욱 가치가 있다. 스스로를 극복하는 동시에 상대를 이겨내고 함께 싸워나간 끝에 얻은 결과. 수기(修己)와 극복(克復)과 협동(協同)이 어우러져야 한다.
↑ 사진=MK스포츠 DB |
지난달 5월31일 잠실 삼성-LG전. 야구팬들은 구태의 악습을 목격했다. 바로 9-3으로 크게 앞선 9회초 2사 2루서 이승엽이 스트레이트 볼넷을 얻어 1루로 출루하는 장면이었다. 이날 앞선 타석에서 2루타 1개와 파울 홈런, 몸에 맞는 볼을 기록한 이승엽은 초유의 통산 400홈런에 단 1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한참 바깥쪽으로 빠진 볼 4개. 포수도 멀찌감치 바깥쪽에 앉아있었다.
의도야 어쨌던간에 ‘기록 피해가기’라는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장면이었다. 패배에 더해 ‘안방에서 남의 잔치의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는 심정이야 일견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400홈런이 갖고 있는 특수성과 기록의 본연의 가치를 생각하면 아쉬운 장면이다. 과거에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야구팬들의 의식도 부쩍 성장한 현재는 참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이기도 했다.
‘폭탄돌리기’의 다음 상대로 지목 된 이종운 롯데 자이언츠 감독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정면으로 그 본질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했다. 2일 포항 삼성전을 앞두고 취재진을 만난 이 감독은 “이승엽이 나온다고 언제까지 거르기만 한다면 그건 야구가 아니지 않냐. (기록 희생양이) 무섭다고 피한다는 건 아닌 것 같다”며 정당한 승부를 강조했다.
투수의 투구에 얼마든지 의도는 있을 수 있지만 그 대상이 단지 ‘기록의 희생양’을 면하기 위한 것은 안된다는 뜻이다. 또한 기록에 대한 의미도 새롭게 해석하길 기대했다. 이 감독은 “분명 맞는 사람에게는 괴로운 일이 될 수 있지만 이것도(홈런을 내준 사람도) 기록의 일부분이다”라며 “아무 기록 없이 사라지는 선수들도 많다. 일부러 내준 것이 아니라면 야구사에 남는 기록은 의미가 크다”며 피해자라는 인식을 바꿀 것을 원했다. 불운한 한 명의 선수가 아닌 함께 한 역사임을 기억하라는 주문이다.
그러면서 이 감독은 “내가 20여년 동안 3루타 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코치 재임 시절 눈 앞에서 서건창이 기록을 깨는 모습을 봤다. 프로야구에서 내가 갖고 있었던 무언가가 이렇게 사라지는 구나 싶어서 조금은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면서 “정정당당하게 붙어서 맞는다면 물론 투수 개인으로서는 순간의 괴로움은 있겠지만 긴 안목에서 보면 평생 동안 기록으로 남는 것이다. 정상적인 승부가 우선이다. 인위적인 피해가기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후 열린 경기서 롯데 투수들은 감독의 말 그대로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했다. 더욱이 상황도 피해갈 수 없는 3번의 만루 상황도 펼쳐졌다. 결과는 이승엽의 3안타 3타점 2득점 완승. 물론 패배에 아쉬움이 남을 이들 역시 많겠지만 만루에서 고의 4구성 볼넷으로 이승엽을 골랐다면 더 잃을 것이 많았을 터였다. 비록 결과적인 패자였지만 롯데 투수들은 ‘정정당당한 승부’라는 스포츠맨쉽에 입각하면 ‘위대한 패자’였다.
롯데 선수들은 또 하나의 깜짝 놀랄만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 바로 순수하게 이승엽의 기록을 함께 축하해주기로 한 것이다. 황재균은 만약 이승엽이 롯데와의 3연전서 400홈런을 친다면 3루에서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다는 뜻을 이 감독에게 조심스럽게 밝혔다. 이 감독 역시 이를 허락했다.
황재균 외 롯데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다. 잠시 승패와 대결의 구도를 내려놓고 ‘동업자’이며, 야구를 배우며 성장했을 당시의 ‘우상’이며 뒤를 따르고 싶은 ‘대선배’의 기록을 함께 축하해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메이저리그 등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장면이지만 KBO리그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모습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승엽의 대기록이 야구인의 입장에서 함께 기뻐할 일이며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온 결정이기도 했다.
2일 경기 종료 후 해당 이야기를 들은 이승엽은 깜짝 놀라며 “(이종운) 감독님께 혼날 수 있다”며 황재균을 말렸다. 하지만 이내 ‘허락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롯데 선수들 모두 축하해주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라며 행복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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