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광주) 이상철 기자] 지난 22일 광주는 뜨거웠다. 시쳇말로 혈투였다. 이 한 경기가 갖는 의미가 크다는 걸 KIA와 한화는 잘 알았다. 코칭스태프, 선수, 관중은 어느 팀을 막론하고 신경이 곤두섰다. 날이 시퍼런 칼 혹은 시한폭탄과도 같았다.
도화선은 여럿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불이 지펴진 건 5회부터였다. 양현종이 처음으로 득점권(1사 2루)에 주자를 내보내자, 이대진 코치가 마운드에 올랐다. 이후 2사 1,3루에서 이용규와 ‘17구’ 접전을 벌이면서 열기는 뜨끈해졌다.
그리고 6회 들어 불똥은 불씨가 돼 더욱 크게 확산됐다. 0-1로 뒤진 KIA의 반격에서 1사 3루 박준태의 1루수 땅볼 때 홈을 파고들던 박찬호가 아웃됐다. 김기태 감독이 포수 조인성의 진로 방해를 항의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 한화의 에스밀 로저스는 22일 광주 KIA전에서 완봉으로 시즌 3승째를 거뒀다. 어느 때보다 예민한 경기였지만 로저스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사진(광주)=김영구 기자 |
그라운드의 열기는 달아올랐다. 시끄러운 쪽은 홈 플레이트가 아닌 외야. 시즌 두 번째 매진 사례를 이룬 외야석에 있던 한 팬이 중견수 이용규에게 오물을 투척한 것. 이에 이용규가 발끈했다. 분위기가 진정되는가 싶었으나 이후 7회와 9회, 이용규가 타석에 들어서자 야유가 쏟아졌다. 여럿이 예민했고 흥분했다.
놀라운 건 한화의 선발투수 에스밀 로저스였다. 그 뜨거운 온도 속에 홀로 차갑게 서있었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필의 안타 판정으로 2사 1,3루의 위기에 몰리자, 야수들을 향해 ‘난 괜찮다’라며 평정심을 유지할 것을 주문했다. 앞서 박찬호에게 3루타를 맞고 무사 3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외국인 선수와 달랐다. 다들 열정적일 때, 그만큼은 냉정했다. 흐트러짐이 없었다. 또한, 대담했다. 어느 한 상황, 그리고 돌발 상황에 대해서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정심을 지켰다. 그는 공 2개로 이범호를 포수 파울 플라이로 처리했다. KIA에게 희망고문만 한 셈.
또한, 위기일수록 침착했다. 9회 2사 이후 연속 안타에 폭투까지 범했다. 마지막 위기였다. 한방이면 동점까지 허용할 수 있었다.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KIA 팬은 20일 전을 떠올리며 또 한 번의 기적을 꿈꿨다.
그런데 로저스는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마운드를 방문한 니시모토 코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딱 공 3개를 더 던졌다. 스트라이크, 그리고 연속 헛스윙. 10번째 탈삼진과 함께 시즌 두 번째 완봉승을 거뒀다. 그때 로저스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포효했다. 참아왔던 감성이 이성을 이긴 순간이었다. 그 울림 속에 그토록 뜨거웠던 열기는 차갑게 식었다.
로저스는 상대의 집중 견제에 대해 당연하다면서 스스로 이겨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대담하다고 했다. 그게 재능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재능을 십분 살렸다. 그저 집중할 따름이다. 수비가 흔들리지 않도록 진정시켰다. 그래야 좋은 수비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 한화의 에스밀 로저스는 22일 광주 KIA전에서 완봉으로 시즌 3승째를 거뒀다. 어느 때보다 예민한 경기였지만 로저스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사진(광주)=김영구 기자 |
하지만 2회부터 로저스는 대단한 투구수 관리 능력을 과시했다. 투구수는 점점 줄었다. 이닝당 10~12개 사이였다. 위기를 맞았던 6회와 9회에도 20개를 넘지 않았다. 빠르고 공격적인 투구로 KIA 타자들을 공략했다. 123
로저스는 유연했고 침착했다. 그리고 대담했다. 끝까지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모두가 시끄럽고 예민한 가운데 홀로 꿋꿋했다. 잘 던진다던 투수는 진짜로 잘 던졌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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