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승민 기자] 그 곳에 그들이 있었다.
1982년 출범 이후 34시즌. 연간 700만 관중의 한국 으뜸 프로리그로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선수들이 KBO의 성장과 감동을 채웠다. 그들 중에는 역사와 기록은 기억하지만 많은 팬들이 깜빡 잊어버리고 만 이름들, 추억 속에 묻힌 레코드 홀더들이 있다.
야구를 기다리는 2월의 MK스포츠가 지금 그라운드의 ‘슈가맨’들을 소환해본다. (편집자 주)
↑ LG 마운드의 ‘원 히트 원더’ 인현배는 강렬한 완봉승 한 경기로 오래 오래 ‘선동열을 이긴 신인’으로 기억됐다. 사진=LG트윈스 제공 |
기억에 남는 경기, 기록을 남긴 경기. 어느 쪽이 진짜 명경기일까.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좋다. ‘슈가맨’ LG 인현배(45)는 기억과 기록을 모두 잡은 한 번의 완봉승을 남겼다.
1994년 6월17일. 잠실구장 LG-해태전은 경기시작 한시간전에 이미 입장권 삼만 장이 동이 났다. 잠실의 ‘주인 같은 손님팀’ 2위 해태가 ‘신바람 1위’ LG를 잡으러 왔던 경기다.
타이거즈 선발투수는 9시즌 연속 1점대 이하 ERA를 기록 중이던 통산 100승의 ‘무등산폭격기’ 선동열(당시 31세). 그에게 맞선 LG의 ‘다윗’은 스물셋 루키 인현배였다.
예상하지 못한 최고의 투수전. 선동열의 시속 150km 광속구에 꽁꽁 얼어버린 쌍둥이 타자들만큼이나 인현배의 영리한 컨트롤 승부에 속절없는 배트를 휘둘러댄 타이거즈 타자들 역시 무력했다. 8회까지 0의 행렬. 그리고 깜짝 놀랄 결말. 마운드를 먼저 내려간 것은 ‘골리앗’ 선동열이었다.
LG는 9회 바뀐 투수 송유석에게 유지현-서용빈이 각각 안타와 사구로 출루한 뒤 1사1,2루서 한대화의 끝내기안타가 터지며 1-0으로 이겼다. 기적같은 승리와 충격적인 패배를 나눠가진 두 팀의 운명은 이 경기 이후 갈렸다. LG는 우승드라마를 썼고 해태는 중위권으로 가라앉았다.
이듬해 풀시즌 마무리로 뛴 뒤 은퇴했던 선동열에겐 8이닝 무실점 했던 이 선발 경기가 완봉의 9부능선까지 갔던 그의 마지막 경기였다. 당대 최고투수의 KBO 통산 최다 완봉승 기록을 ‘30’으로 갈아치우는 대신 겁 없는 신인의 데뷔 첫 완봉승으로 마무리되면서 뜻밖에 이 경기는 KBO의 더욱 진귀한 역사로 남게 된다.
인현배는 9이닝 6피안타를 허용하는 동안 단 한 개의 탈삼진을 섞지 않고 무실점으로 버텼다. KBO의 14번째 무탈삼진 완봉승이었고 리그의 20세기 마지막 무탈삼진 완봉승이었으며 이후 지난 시즌까지 어떤 투수도 15번째 기록을 추가하지 못했다.
탈삼진 없이 완봉하는 것은 사사구 없이 완봉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무탈삼진 완봉승은 LG의 ‘우승가뭄’과 나란히 22년째 실종 중이지만, KBO의 무사사구 완봉승은 지난해 유희관(두산)까지 121차례 이어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막상 진기록의 그날, 종합지 스포츠면의 헤드라인을 더 많이 장식했던 투수는 따로 있었다. 대구에서 당시 리그 최고의 ‘영건’ 에이스였던 정민철(한화)이 삼성의 28타자에 맞서 1안타 완봉경기를 펼치는 바람에. (정민철은 ERA 2.15로 ‘방어율왕’에 올랐던 이 해, 두차례 1안타 완봉경기를 했고 3년 뒤인 1997년 기어이 노히트노런에 성공했다.)
↑ 잠실에서 루키 인현배가 무탈삼진 완봉승을 거둔 날, 대구에서는 3년차 ‘스타투수’ 정민철이 그의 첫 1안타 완봉승을 했다. KBO의 24번째 1안타 완봉승이었다. 사진=한화이글스 1999년 팬북 |
‘선동열을 이긴 신인’ 인현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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