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최악의 대지진 ◆
불과 나흘 전에 사람이 살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에 주택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끊어진 전신주, 쓰나미에 휩쓸려 내동댕이쳐져 찌그러진 자동차, 흙더미에 깔려버린 주택들이 선박들과 뒤엉켜 거대한 공동묘지를 연상케 했다. 흙 속에서 삐져나온 가족들의 추억이 담겨 있는 앨범, 휴대전화, 교과서 등이 당시의 급박했던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줬다.
흙더미에 도시 전체가 파묻혀버린 미야기현 히가시마쓰시마(東松島)를 14일 찾았다. 센다이시에서 동북쪽으로 40여 ㎞ 떨어진 곳이다.
센다이 시내에서 자동차로 4시간가량을 달려 도착한 이곳에서는 지축을 뒤흔든 지진의 참혹함이 고스란히 전해왔다.
평상시 1시간이면 도착할 곳이지만 도로가 사라지고 끊어진 탓에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았다. 곳곳에서 만난 자위대와 경찰 등이 무슨 일 때문에 가는지 되풀이해서 묻고 돌아가라며 차량 이동을 제한했다. 잠시만 머물겠다는 약속을 한 뒤에야 히가시마쓰시마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곳에 접근 제한이 강화된 것은 13일 쓰나미로 인해 히가시마쓰시마 노비리지구에서 사체 200여 구가 발견된 때문이다. 실제로 14일에도 자위대 병력이 모포로 감싼 시신을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장에서 만난 주민 야마모토 겐타로 씨는 "전쟁이 난 것 같다"고 참혹상을 표현했다.
이미 미야기현 사망자가 최소 1만명을 넘었다는 보도가 나왔고 14일에도 해안가에서 시신 2000구가 추가로 발견됐다는 소식도 있었다. 가옥 수천 채가 수몰된 이곳에서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은 쓰나미가 덮치고 간 자리에서 스스로 살아남는 일 만큼이나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희망의 끈이라도 붙잡으려는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족들의 흔적을 찾아 흙더미를 헤맸다.
이가라시 도모코 씨(72)는 원래 집이 있던 자리에서 행방불명된 남편의 휴대전화를 찾았다. 손자가 선물해줬다는 스누피 전화끈도 여전히 달려 있는 채였다.
"남편이 어디에 있을까요? 찾아야 하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하는 그는 쓰나미가 발생할 당시의 악몽 같은 상황을 떠올렸다.
이가라시 씨는 쓰나미가 덮치던 그 순간 피난소를 향해 뛰고 있었다. 그러나 불편한 몸에 빠른 이동이 어려웠고 그 역시 물길에 휩쓸려 한동안 표류하다 가까스로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구조됐다. 그러나 함께 움직이던 남편의 모습은 그 뒤로 찾을 수 없었다.
"남편은 지진 발생 직후에도 도쿄에 사는 딸과 무사하다는 연락을 했는데…, 이제는 주인을 잃은 채 진흙만이 붙어 있는 전화기만 남았네요." 그는 끝내 울먹이기 시작했다.
76세 농부 가사마쓰 마사히라 씨는 맨발에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올린 채 물에 잠긴 도로를 헤쳐나갔다. 그의 발은 쓰나미에 휩쓸려 온 진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내 딸의 이름은 요코 우사토예요. 혹시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의 표정에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는 "사망자 명단에 내 딸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어요"라며 또다시 물에 잠긴 도로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가족을 잃어버린 주민들에게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 가족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매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가족의 시신을 발견한 사람들에게도 슬픔은 매한가지였다. 집이 있던 자리에서 모친의 시신을 발견한 사토 겐지 씨는 "상상할 수도 없는 광경"이라면서 "수십 명이 더 묻혀 있을 것 같다"며 울먹였다.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 있는 센다이시 피난소에는 13일 밤 잠자리가 부족해 젊고 건강한 남성들은 건물 바깥에 신문지를 깔고 잠을 청했다. 대부분 사람은 잠이 오지 않는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현재 센다이시에만 310곳에 27만여 명이 피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피소 안에는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잠을 자지 못한 것도, 먹을 것이 부족한 것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과연 내일은 나와 내 가족이 살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공포감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대피소에 있던 마사키 고쿠붐 씨(35)의 말 속에 쓰나미를 겪은 일본 열도의 공포감이 압축돼 있는 듯했다.
[히가시마쓰시마(미야기현) = 정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