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주 주지사를 세 차례 연임한 거물 정치인 마리오 쿠오모가 1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의 자택에서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뉴욕 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현지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쿠오모는 대를 이어 뉴욕 주지사가 된 아들 앤드루 쿠오모가 연임에 성공해 이날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취임식을 한 지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뒀습니다.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근 몇 달간 심장 질환 등으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쿠오모는 비록 중앙 정계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뛰어난 사고력과 강한 개성, 웅변을 바탕으로 뚜렷한 존재감을 보였고 미국에서 진보주의가 외면을 당하던 시기에 사형 반대와 낙태 허용을 포함한 진보주의적 가치를 옹호하고 나서면서 민주당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그가 뉴욕주의 경계선을 넘어서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정치인으로 올라선 것은 1984년 민주당 전당대회 당시의 연설 덕분이었습니다. 쿠오모가 공화당 출신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자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돼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자였던 월터 먼데일이 그늘에 가릴 정도였습니다.
쿠오모는 레이건이 미국을 성경에 나오는 '언덕 위의 빛나는 도성'이라고 표현한 것을 꼬집으면서 "대통령은 이 나라가 언덕 위의 빛나는 도성'이라기 보다는 '두도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인용해 레이건이 가난한 미국인들의 처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이 연설로 각광을 받은 쿠오모는 이후 공화당을 상대할 마땅한 대선 후보가 없던 민주당으로부터 두 차례나 출마해달라는 구애를 받았으나 민주당에는 좌절을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대권 도전을 놓고 장고를 거듭하는 바람에 정치분석가들이 "허드슨강의 햄릿'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1988년 대선을 앞두고 쿠오모가 백악관 입성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관측이 높아갔지만 1987년 2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자리에서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민주당의 대선 후보인 마이클 듀카키스가 패배하자 쿠오모의 거취는 더욱 관심거리가 됐습니다. 1992년의 대선을 앞둔 1991년 12월 뉴욕주의 주도 올버니의 공항 활주로에서 벌어진 일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장면입니다. 당시 활주로에는 민주당 후보 경선 참여를 결심한 쿠오모가 뉴햄프셔주로 등록비를 내러 가기 위해 수행원들과 함께 타고 갈 전세기 2대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쿠오모는 그러나 등록 시한인 오후 5시를 불과 90분 앞두고 다시 한번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뉴욕주 정부의 업무에 전념하겠다는 것이 고사 이유였으나 가까운 친구들조차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쿠오모는 세인트존스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로펌에서 일했으며 1975~1978년 뉴욕주 장관, 1979~1982년 뉴욕주 부지사를 거쳐 1983년부터 1994년까지 3선의 뉴욕주지사를 지냈습니다.
뉴욕 주지사로서는 넬슨 록펠러를 제외한 다른 51명의 전임 주지사들보다 장수했습니다.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서는 첫 뉴욕 주지사이기도 하고 부자가 뉴욕 주지사에선출되
대선을 포기한 뒤 1994년에 네 번째 주지사 연임에 도전했지만 공화당 후보 조지 파타키에 패배하면서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주택장관을지낸 아들 앤드루가 가문의 영광을 이었습니다.
로스쿨 재학중에 만난 부인 마틸다와의 사이에 앤드루를 포함해 5명의 자녀와 14명의 손자를 두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