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세월엔 장사가 없는 것일까.
1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수억 명의 관객을 모았던 이른바 블록버스터급 서커스들이 최근 속속 경영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서커스의 ‘주인공’인 동물에 대한 학대논란과 자극적인 디지털 컨텐츠가 범람하면서 흘러간 ‘올드 펀’(Old fun)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지난달 초 ‘지상 최대의 쇼’로 유명한 미국 서커스 제작사 ‘링링 브라더스 앤드 바넘&베일리사’의 경영진은 침울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아레나 펠드 부사장은 “100년 전통의 쇼를 중단한다는게 살을 깎는 것보다 어려운 결정이지만 논란이 계속되니 ‘점보’를 포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점보’란 ‘지상 최대의 쇼’ 창작자인 P.T바넘이 1882년 영국 런던 동물원에서 사왔던 아프리카산 코끼리 이름이었다. 강아지처럼 훈련시켜 말 잘 듣는 점보코끼리 묘기는 미국인들을 열광시켰다. 원조 점보코끼리는 1885년 운송 중 열차사고로 죽었지만 인기는 계속됐고 급기야 ‘점보제트’(대형여객기), ‘점보모기지’(신용도 높은 주택담보대출)등에 접두어로 ‘점보’가 붙는 등 일상 속 깊숙이 침투해왔다.
세계 각지에서 매년 총 5000회, 매회 평균 3000명의 관객을 끄는 인기서커스 ‘지상최대쇼’에서 ‘점보’는 없어선 안될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링링브라더스의 모회사인 펠드엔터테인먼트는 이제 핵심자산인 43마리에 달하는 코끼리 군단을 2018년까지 모두 팔아야 한다. 동물학대 중지를 요구하는 동물보호단체들과 싸움과 제소 등으로 수십만달러에 달하는 벌금과 법정비용이 누적되자 결국 백기를 들었다.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는 최신호에서 “펠드는 코끼리를 조련할 때 쇠갈고리인 ‘불후크’(bullhook)를 사용했고 채찍질도 가하는데 코끼리 피부는 얇고 민감해 벼락을 맞은 듯 고통스러워한다”고 보도했다. 펠드 부사장도 “고객들 성향이 달라졌다”며 “서커스단이 코끼리들과 순회 공연하는 것을 불편해 하는 고객이 많아졌다”고 밝혔다.
펠드는 곧 작별인사를 고할 코끼리를 대신해 몽골낙타를 내세워 새 공연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흥미없다”, “또다른 동물학대”라며 싸늘하다. ‘지상 최대의 쇼’가 ‘지상 마지막 쇼’를 준비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쇠퇴해가는 서커스 산업의 그늘은 전통적 동물쇼 모델을 버리고 헐리우드식 스토리라인과 곡예 쇼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에도 덮쳤다.
태양의 서커스는 1984년 거리의 공연가들이 의기투합해 캐나다 퀘벡에서 시작된 후 줄타기, 그네타기 등 인간이 연출할 수 있는 곡예 한계와 마술쇼 같은 연출을 보여주며 매년 1억 명의 관람객을 세계 각지에서 모았다. 언론들 조차 “서커스를 종합예술의 반열에 올려놨다”고 극찬했을 정도다.
쇼의 연출자이자 제작자인 기 라리베르테 대표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CEO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미국의 대형 사모펀드 TPG캐피털에 공연단을 매각하며 “직원들 고용만 유지해달라”며 애원하는 처지가 됐다. 갈수록 높아지는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했지만 흥행실적부진이 부적되며 재정난이 가중된 게 직격탄이었다. TPG펀드는 미국의 유명 리조트와 카지노에 공연단을 보유하고 있으며 영화, TV 등 다양한 미디어 산업을 보유한 회사다.
전문가들은 TPG펀드가 인수하게 되면 현재 보유 중인 리조트에서 규모를 축소해 쇼를 이어가거나 아니면 아예 오프라인 쇼보다는 공연단을 이용한 영화·TV 등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에 서커스를 이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어떤 방식이던 ‘태양의 서커스’의 명성은 퇴색될 운명이라는 얘기다. 블룸버그통신은 “손바닥 속 각종 기기를 통해 원하는 강도의 자극적 컨텐츠를 바로 바로 얻을 수 있는 시대”라며 “서커스는 이제 흘러간 ‘올드 펀’(Old fun)”이라고 말했다.
멀어져 가는 대중의 관심을 어떻게든 잡아보려는 서커스산업의 몸부림은 애처롭다. 수년전 미국 라스베이거스판 ‘태양의 서커스’를 제작하는 프로덕션에선 19세 이상 관람가 성인서
이 서커스는 비키니에 가까운 복장의 여성들을 앞세워 곡예 쇼를 한다. 일각에선 “여성의 신체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예술”이라는 반응도 있지만 “가족단위 엔터테인먼트 쇼인 서커스를 세미포르노로 전락시켰다”는 혹평을 받기도 한다.
[이지용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