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링깃화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가 24일 지난 97년 금융위기 당시 수준으로 떨어지는 폭락세를 보이자 90년대 후반 아시아금융위기의 출발점이 된 1994년의 ‘데자뷔’(기시감)가 아니냐는 공포감이 시장에 확산되고 있다.
94년에도 최근 상황처럼 위안화의 급격한 평가 절하->미국의 전격적인 기준금리 인상->아시아 신흥국의 자본엑소더스(대이탈)의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24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날 말레이시아 링깃화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는 지난주에 이어 약세를 보이면서 달러화 대비 17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아시아권 국가 중 통화가 강세를 나타낸 것은 달러화와 함께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일본 엔화가 유일했다. 시장에선 중국의 위안화 약세로 인해 갈수록 신흥국 통화가치가 더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신흥국 통화가치가 급락하면서 투자자들 사이엔 공포감이 만연하고 있다. 최근 13개월 사이 아시아 신흥국에서 빠져나간 자본은 9402억 달러에 이르고 있고 갈수록 이탈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 중이다.
‘채권왕’으로 불리는 빌 그로스는 지난 주말 트위터를 통해 “글로벌 경기침체의 중심에 신흥시장 통화가치 하락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의 이런 현상의 시발점을 경기부진으로 중국 정부가 지난 11일부터 전격 실시한 위안화 기습 절하와 함께 미국 기준금리 9월 인상 가능성 등으로 보고 있다.
또 이런 상황들이 지난 94년 1월 중국이 침체된 내수경기 활성화와 수출증대를 위해 위안화 가치를 50%를 기습절하했을 당시와 상당히 닮아있다는 지적이다. 당시 위안화 평가 절하로 중국 경제는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선진국의 주가 버블과 신흥국 통화 약세의 부작용이 커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미국은 한달 뒤인 94년 2월 예고도 없이 기준금리를 기습 인상했다. 내달 미국 연방제도이사회(FRB)가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한 것과 닮은 꼴 시나리오다.
당시 미국은 예고없는 금리 인상으로 세계 금융시장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미국 채권시장에서는 ‘대학살(Bloodbath)’이라 불리는 채권가격 폭락 사태가 벌어졌다.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 환율이 급락하고 주식도 폭락했다.
뒤이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요 국가들에서 ‘핫머니’(단기투자자금)가 줄줄이 이탈하며 IMF(국제금융기구) 구제금융을 받는 국가들이 속출했다.
상황이 외환위기 때와 유사하지만 다른 점들도 있다. 아시아 국가들의 경상수지와 재정 여건, 외화보유액이 당시보다 상당히 개선된데다 미국도 당시 쇼크를 교훈 삼아 지난해 말부터 줄곧 시장에 금리인상 신호를 통해 충격을 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만 하더라도 단기 외채가 2010년 1400억달러(156조원)에서 2015년 현재 1153억달러(129조원)로 줄어들었다. 외환보유고도 3700억 달러(414조원)로 풍부한 편이다. 태국 등 다른 아시아 신흥국도 상황은 엇비슷하다.
하지만 외환위기 재발에 대한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94년 당시 보다 아시아 국가들의 중국 경제 의존도가 더 커진 반면, 94년 때와 달리 갖은 부양책에도 중국 경기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다는 것이다.
아시아 외환
[이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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