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총을 마주 겨눴던 미국과 베트남이 ‘공공의 적’ 중국 앞에서 손을 맞잡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간) 베트남을 찾아 쩐 다이 꽝 국가주석, 응우옌 티 낌 응언 국회의장, 응우옌 쑤언 푹 총리,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 등 이른바 베트남 ‘빅4’를 잇따라 만나 베트남에 취해진 미국의 살상무기 수출금지 조치 해제와 베트남 중부 다낭에 미군 군수물자를 사전배치하는 방안, 그리고 베트남 깜라인만 미군 입성 허용 여부 등을 논의했다.
무기 금수조치 해제는 베트남이 원하는 것이고 다낭 군수물자 배치와 깜라인만 미군 입성은 미국이 원하는 것인데 세 가지 사안 모두 중국을 견제하려는 공동목표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1995년 수교 이후 베트남에 대한 비(非)살상무기 수출을 허용했다. 하지만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 스프래틀리 군도(난사군도)에 활주로 건설을 시작하면서 베트남은 군비확장 필요성이 커졌다. 스프래틀리 군도에서 베트남 사이공까지는 한 시간 거리다. 베트남과 중국은 1970년대부터 스프래틀리 군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충돌을 빚고 있다.
미국으로서도 살상무기 금수조치 해제 카드를 진지하게 고려 중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베트남의 협조가 절실한데다, 남중국해에서 군사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분쟁 당사국이자 인도차이나반도의 맹주인 베트남과의 협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미군 군수물자 배치를 논의하고 있는 다낭은 베트남 중부에 위치해 남부 사이공 항, 북부 하이퐁 항과 함께 베트남 3대 항구도시다. 미국은 역내에서 발생하는 자연재해 등에 대비해 복구작업 등에 사용되는 군사 물자와 장비를 다낭에 비축한다는 계획이다. 중요한 것은 다낭이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남중국해에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1965년 미국이 대규모 지상 전투부대를 파견해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상징적인 장소라는 점이다.
깜라인만 미군 입성 허용 카드는 무기 수출 금지조치 해제를 위해 베트남이 제시한 카드다. 깜라인만은 남중국해까지 불과 320㎞ 거리로 동남아 최고의 천연 요새일 뿐 아니라 수심이 깊어 전략적 가치도 매우 높다. 미군이 깜라인만에 입성할 수 있다는 것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것으로 미국은 중국과의 대결 국면에서 아주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는 셈이다.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은 깜라인만 미군 입성이 가능해진다면 베트남 무기 수출을 허용하는 것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베트남 방문에서 인권개선 문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활용방안 등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논의를 가졌다. 미국, 일본, 베트남 등 12개국이 지난 2월 TPP에 공식 서명하고 국가별 비준을 추진 중이다. 베트남 정부는 오는 7월 국회에 비준 동의안을 제출할 예정이다.
또 오바마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을 계기로 미국과 베트남 기업 간에 160억달러(약18조4000억원) 규모의 계약이 성사됐다. 미국 엔진 제조사인 프랫앤휘트니는
오바마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에 이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세번째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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