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역사를 쓰다…트럼프·샌더스 넘을까

“이것으로 주별 공개투표 결과 발표를 마치고 힐러리 클린턴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하자.”
미국 주요 정당 역사상 첫 여성 대선후보 탄생을 알린 목소리는 다름 아닌 경선 경쟁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버몬트)였다. 샌더스의 제안에 대회장은 “힐러리”를 연호하는 함성으로 가득 찼다. 26일(현지시간) 민주당 전당대회 둘째날 가장 중요한 행사는 공식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주별 공개투표 결과(Roll Call Vote)발표였다. 앨라배마부터 와이오밍까지 알파벳 순으로 후보별 대의원 득표결과를 발표, 대의원 과반수 지지를 받은 인물을 민주당 대선후보로 공식 지명하게 된다. 46번째 순서인 사우스캐롤라이나 득표 결과 발표후 힐러리는 2380표를 채웠고 47번째 사우스다코다주가 “힐러리 클린턴 15표, 버니 샌더스 10표”를 발표하면서 힐러리는 2395표를 확보, 대의원 과반을 뜻하는 매직넘버 2383명을 넘어섰다. 투표는 이미 힐러리 승리로 끝났지만 절차에 따라 나머지 주의 공개투표 발표를 계속했다. 51번째로 샌더스가 속한 버몬트 주 차례가 됐지만 발표 순서를 마지막 주인 와이오밍 주 뒤로 미뤘고 모든 주가 발표를 마친 후 샌더스가 직접 힐러리 후보 확정을 선언했다. 8년전 힐러리가 버락 오바마 후보 지명을 발표했던 것과 비슷한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투표 과정에서 샌더스 지지자들의 격렬한 항의 시위가 우려됐지만 통합을 당부하는 샌더스의 격정적 호소 탓에 차분하게 주별 공개투표가 진행됐다. 일부 강경 샌더스 지지자들이 투표 도중 눈물을 흘리며 전당대회장을 빠져나오면서 “이게 민주주의냐, 수퍼대의원은 꺼져라”며 항의하기도 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이로써 11월 미국 대선은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두 후보간 세기의 대결이 펼쳐지게 됐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구도는 물론이고 미국 주류 정치인과 ‘아웃사이더’의 대결, 대통령 가문과 부동산 재벌의 대결, 로스쿨 출신과 MBA 출신 대결 등 여러 측면에서 흥미로운 승부를 예고하고 있다.
힐러리와 트럼프는 앞으로 전국 유세와 함께 9월 26일과 10월 9일, 10월 19일 3차례 TV토론을 거쳐 11월 8일 대선을 치르게 된다. 힐러리가 ‘유리 천장’을 깼다는 데 많은 여성 유권자들이 흥분하고 있다. 힐러리 스스로도 후보 지명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역사(History)’라고 썼다. 1776년 7월 4일 독립을 선포한 미국 역사에서 지금까지 여성 대통령은 물론 여성 부통령도 나오지 않았다. 주요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에서는 여성이 대선후보가 된 적도 없다.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면 남편 빌 클린턴에 이어 부부 대통령이라는 진기록도 세우게 된다. 힐러리는 지난 2008년 대권에 도전했지만 당내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에게 패하고 8년만의 재도전에 성공한 것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 하지만 힐러리가 여성 첫 미국대통령이라는 역사를 쓰기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힐러리보다 트럼프에 유리한 형국이고, 제조업 침체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중북부 지역 노동자들이 힐러리가 속한 민주당에 반감을 키우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신 고립주의’와 이민자에 의한 잇따른 테러도 트럼프가 부추기는 반(反)난민·이민정서를 키워 힐러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트럼프의 히스패닉 비하 발언 등으로 흑인과 히스패닉이 결집하고 있지만 백인 경찰에 의한 흑인 희생에 이어 흑인의 백인 경찰 저격사건이 잇따르면서 백인층도 세를 결집하고 있어 판세를 예단하기 힘들다는 정치분석가들의 진단이다.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이메일 스캔들’과 ‘벵가지 사건’도 여전히 힐러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샌더스를 지지했던 젊은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것도 급선무다. 샌더스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게 할 수는 없다”며 힐러리 지지를 호소했지만 젊은층 사이에서 힐러리에 대한 거부감이 워낙 강해 이들이 고스란히 힐러리를 지지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이날 공개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힐러리 비호감도가 57%를 기록, 역대 최고치에 달해 캠프에 비상이 걸렸다. 지난달 힐러리와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80대 20으로 예측했던 미국 통계학자이자 대선 쪽집게로 불리는 네이트 실버는 이날 트럼프 승리 가능성을 57, 힐러리 승리 가능성을 43으로 수정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지지율이 전당대회 효과에 힘입어 힐러리 지지율을 역전한 것도 걱정스런 대목이다.
한편 샌더스 제거를 논의한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이메일 폭로로 파장을 일으킨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 창업자 줄리언 어산지가 미국 대선 관련 추가 폭로 가능성을 예고해 미국 정가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어산지는 이날 CNN과의 인터뷰에서 “더 많은 자료를 공개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라인스 프리버스 공화당 전국위원회(RNC) 위원장은 전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앞으로 민주당에 문제를 일으킬 이메일들이 더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필라델피아 = 이진명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