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역사가 저물었다. 평생을 초강대국인 미국과 대립했던 피델 카스트로가 90세 일기로 그의 평생 동지였던 체 게바라 옆으로 갔다. ‘세기의 혁명가’와 ‘독재자’라는 양극단의 평가 속에 피델의 공과는 역사의 몫으로 남게 됐다.
피델의 카스트로의 동생으로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물려받은 라울 카스트로는 25일(현지시간) 국영 TV 방송에 나와 카스트로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쿠바 정부는 피델을 위해 9일간의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그 중 3일은 1959년 그가 공산 반군을 이끌고 승리의 대장정을 했던 지역을 유골이 순방하는 행사를 실시한다고 장례식 조직위원회가 발표했다.
카스트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사회주의 신념이나 반미 정신은 그가 즐겼던 시가와 턱수염,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으로 상징된다.
1926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피델은 인권변호사 활동과 노동운동가 활동을 하다가 1959년 아르헨티나 출신의 체 게바라 등과 함께 공산혁명을 주도·성공하며 총리가 됐다. 그는 1965년 쿠바 공산당 제1서기에 오르며 쿠바를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공산혁명으로 총리에 오른 뒤 2011년 건강 악화를 이유로 공산당 제1서기직을 넘기기까지 장장 52년 2개월 간 집권 기록을 남겼다. 이는 군주를 제외하고 20세기 지도자 중 최장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피델은 재임 중 10명의 미국 대통령을 상대하며 미주 대륙 유일의 공산국가를 이끌었다.
피델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을 오간다. 체 게바라가 ‘남미의 혁명 완수’라는 목적으로 피댈과 결별하며 볼리비아, 니카라과 등에서 활동하다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사망하며 ‘영원한 혁명가’라고 불리지만 피델은 독재자 이미지가 강했다. 1962년 소련의 핵미사일을 배치하려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불러 핵전쟁의 공포가 지구촌을 휘감게 했다. 부유층을 중심으로 정적들을 숙청하며 대규모 난민을 양산해 인권탄압의 장본이라는 오명도 얻었다.
그럼애도 피댈은 무상의료·무상교육을 실시해 사회주의 국가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지도자라고 평가받는다. 피델이 혁명 성공 이후 미국 CBS 뉴스와 인터뷰에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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