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부채의 홍수에 빠진 신흥국이 미국의 통화긴축 리스크에 휘청일 수 있다는 우려감이 고조되고 있다.
신흥국들의 달러 빚은 갈수록 늘고 있는데 달러가치의 상승으로 부채 부담이 한층 커질 경우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험에 빠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23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은 금융정보업체 딜로직을 인용해 올 1분기 신흥국 정부와 기업들이 발행한 달러 표시 채권이 1790억달러(약 200조원)에 달해 1분기 기준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전년 동기 대비 2배가 넘은 수치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까지 신흥국들의 달러 채권은 3조6000억달러로 역시 사상 최대 규모로 커졌다. 신흥국 기업들의 달러 부채 중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것만 1200억달러에 달한다. 달러가 아닌 현지 통화로 발행한 채권까지 포함하면 신흥국 회사채는 2008년 이후 17조달러 증가했다고 국제금융협회(IIF)는 분석했다.
신흥국들이 달러 자금을 대거 조달한데는 미국의 초저금리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제로금리와 함께 대규모 양적완화에 돌입하자 신흥국 기업들은 달러 채권 발행에 일제히 눈을 돌렸다. 채권 발행 비용이 저렴한데다 풍부한 달러 유동성 덕분에 달러채 발행이 용이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지난 2015년 12월과 지난해 12월에 이어 올해 3월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미국의 통화긴축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달러 가치 강세 가능성이 높아졌고 이 경우 달러 부채를 갚아야 하는 신흥국 정부와 기업들의 부담이 훨씬 커질 수 있다. 자국 통화로 돈을 벌어들이는 기업은 만기가 도래한 달러 부채를 갚을 때 달러 강세에 놓이면 상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달러 가치가 오르면 이에 따라 상환 리스크에 노출되는 신흥국 회사채는 135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토비아스 애드리안 IMF 수석금융이코노미스트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신흥국 기업들은 여전히 취약하고 변동성에 노출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 '테이퍼 탠트럼'(긴축발작)을 상기시키면서 "글로벌 금리 인상이 신흥시장에 부정적 충격을 던질 수 있다는걸 목격했고 이 리스크는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테이퍼 탠트럼은 2013년 벤 버냉키 당시 연준 의장이 자산매입 규모를 시사하자 신흥시장에서 대규모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태를 말한다. 당시 신흥시장에서 무려 400억달러의 자금이 빠져나갔다.
에스워 프라사드 코넬대 교수는 "달러 가치가 오르면 경상수지 적자와 달러 표시 부채가 많은 신흥국들이 이중고를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이러한 리스크에 노출돼 있고 베네수엘라, 터키는 취약성이 한층 높다.
남아공과 터키의 주요 통신사나 베네수엘라의 대형 원유업체들은 이미 디폴트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미 금리 인상과 달러 강세 리스크에 이어 원자재가격 하락, 보호무역주의 확산에 따른 연쇄 후폭풍에 휩싸일 우려도 제기되
스탠다드앤푸어스(S&P)글로벌은 지난해 신흥시장에서 발생한 달러 표시 채권의 디폴트가 32차례에 달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많았다고 지적했다. 만약 연준이 시장 예상보다 더 빨리 금리를 올릴 경우 신흥국들의 충격은 훨씬 커질 수 있다는 경계감이 월가에 확산되는 모습이다.
[뉴욕 = 황인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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