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안철수 후보를 보낸 문재인 후보의 마음이 이 시구와 같다 하면 너무 억지일까요?
안철수 후보가 후보직을 사퇴했지만, 문재인 후보의 마음속에는 안 후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문재인 후보가 어제 대선 후보 등록을 한 직후 한 기자회견입니다.
▶ 인터뷰 : 문재인 / 민주통합당 후보(11월25일)
- "야권 단일후보로 등록하게 되기까지 안철수 후보의 큰 결단이 있었습니다. 고맙다는 마음 이전에, 커다란 미안함이 있습니다. 안철수 후보의 진심과 눈물은 저에게 무거운 책임이 되었습니다. 저의 몫일 수도 있었을 그 눈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안 후보의 갑작스러운 사퇴는 문 후보에게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10년 전처럼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가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고, 아름답게 소주잔을 러브샷하기를 꿈꾸던 상황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안 후보의 사퇴 기자회견은 두 지지세력이 하나로 합쳐질 것이라는 기대를 송두리째 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격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안 후보 사퇴 기자회견을 잠깐 들어보겠습니다.
▶ 인터뷰 : 안철수 / 무소속 후보(11월23일)
- "국민 여러분. 이제 단일 후보는 문재인 후보입니다. 그러니, 단일화 과정의 모든 불협화음에 대해서 저를 꾸짖어 주시고, 문 후보께는 성원을 보내 주십시오. 비록, 새 정치의 꿈은 잠시 미뤄지겠지만, 저 안철수는 진심으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정치를 갈망합니다."
안 후보는 지지세력에 문재인 후보에게 성원을 보내달라고 말했지만, 왠지 그 말에는 서운함이 가득 담겨 있는 듯합니다.
지지자들도 당연히 그 마음을 읽었으니, 문재인 후보를 온전히 지지하긴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안철수 지지층의 절반 정도만이 문 후보에게 갔고, 20% 안팎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나머지는 부동층으로 돌아간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재인 후보가 꿈꿨던 '1+1=3'이라는 단일화 공식은 실제와 달랐습니다.
그래서일까요?
MBN 긴급여론조사에서도 박근혜 후보 44%, 문재인 후보 40%로 후보 단일화 전보다 격차가 더 벌어졌습니다.
10년 전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이후 단번에 40% 벽을 넘으면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앞선 것과 너무나 다릅니다.
안 후보를 지지했던 중도와 20대는 아직 갈 곳을 찾지 못한 듯합니다.
이들을 끌어오지 않고서는 문 후보가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들을 지지층으로 흡수하려면 문 후보 스스로 잘해야 하지만, 안 후보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문재인 후보는 결코 안철수 후보를 보낼 수 없는 처지입니다.
문재인 후보의 말입니다.
▶ 인터뷰 : 문재인 / 민주통합당 후보(11월25일)
- "이제 정권 교체를 바라는 모든 국민은 하나입니다.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던 모든 세력, 후보 단일화를 염원했던 모든 분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는 ‘국민연대’를 이루겠습니다."
칩거에 들어간 안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도울까요?
서운함이 가득 담긴 듯한 안 후보의 사퇴 기자회견만 놓고 보면, 안 후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새 정치의 꿈이 잠시 미뤄졌다'는 말에서는 문 후보에게 그 꿈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안 후보가 TV 토론 후 문재인 후보에게 실망했다는 말도 들립니다.
성인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선뜻 문 후보를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서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안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아무 역할 없이 조용히 있기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안 후보의 도움 없이 문재인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안 후보는 '옹졸한 사람' 내지 '없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안 후보의 도움이 없어 문재인 후보가 대선에서 패한다면, 안철수 후보는 야권 지지자들로부터 '대선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판이 쏟아질 게 뻔합니다.
정치인의 길을 계속 가겠다는 안 후보에게는 이것은 결코 가벼운 시련이 아닐 것입니다.
박근혜 후보 역시 안 후보 지지세력을 잡으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확실하게 대선 승리를 장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 후보의 말입니다.
▶ 인터뷰 : 박근혜 / 새누리당 후보
-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지 못한 국민대통합과 국민행복시대를 열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국민이 원하는 책임 있는 변화와 새로운 정치, 새로운 시대를 반드시 만들겠습니다."
'새로운 정치', '새로운 시대'는 안철수 후보
박 후보가 안 후보 지지층과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이들을 흡수할 수 있을까요?
안 후보는 이런 모습을 보며 어떤 결정을 할까요?
이번 대선은 안철수 후보가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김형오의 시사 엿보기였습니다. [김형오 기자 / hokim@mbn.co.kr] MBN 뉴스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