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저희만 가지고 사찰이라 하느냐"
지난달 3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출석한 김진욱 공수처장이 민간인 사찰을 질타하는 국민의 힘 의원들에게 한 말이다.
"통신조회 검찰 59만건, 경찰 187만건, 저희는 135건"이라는 발언도 덧붙였다.
윤석열 국민의 힘 대선후보와 배우자 김건희씨 통신조회도 공수처보다 검경이 더 많이 했다고도 했다.
한마디로 검경도 하는데, 왜 공수처만 문제 삼느냐는 거다.
본질을 한참 벗어난 황당한 변명이다.
일단 검찰은 1년에 100만건이 넘는 사건을 접수하고 경찰은 이보다 더 많다.
반면 공수처가 수사중인 사안은 10여건에 불과하다. 수치적으로 검경과 통신조회 건수를 비교하는것 자체가 코미디다.
물론 검경 통신조회도 최소한으로 해야한다. 그렇다고 김 처장이 사찰 방어논리로 물귀신 작전을 쓰는건 비겁하다.
국민들은 검경이 아닌 공수처에 묻고 있다.
고위공직자 부패·범죄를 수사하라고 했더니 하라는 일은 안하고 도대체 왜 300여명에 가까운 민간인을 대상으로 통신조회를 했는지에 대해 국민들이 묻고 있다.
공수처를 곤혹스럽게 한 기사를 게재한 언론인과 야당 국회의원들이 왜 집중적인 통신조회 표적이 됐는지를 묻고 있다.
공수처 수사와 전혀 관계가 없는 오세훈 서울시장은 왜 통신조회 대상이 됐는지, 이 정권에 비판적인 대자보를 썼던 대학생들의 통신정보는 왜 털었는지를 묻고 있다.
이같은 사찰 의혹이 제기된것만으로도 공수처와 공수처장은 국민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그런데도 사과는 커녕 "우리만 그런게 아니라"는 황당한 핑계를 대니 국민들이 어처구니 없어하는것이다.
수사 필요성과 상당성에 걸맞는 수준으로 통신조회는 최소화하는게 수사의 기본이고 인권보호의 시작이다.
공수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뜨는게 "국민의 신뢰를 받는 인권친화적 수사기구 국민과 함께 만듭니다"이다.
지난해 1월 21일 초대 공수처장 임명장 수여식때 대통령 앞에서 공수처장은 이렇게 말했다.
"인권 친화적 수사기구가 되는데 초석을 놓아 국민 신뢰를 받는다면 검찰의 잘못된 수사 관행도 변화할 것이다"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개인정보 조회 등 인권훼손 수사관행을 질타하고, 이런 검경과는 달리 인권을 최우선하는 수사를 약속한것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기존 검경의 관행을 답습하며 더 노골적으로 통신조회를 남발한 공수처의 표리부동한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렇다면 사죄를 하는게 정상인데 그렇게 비판했던 '잘못된' 검경의 관행을 방패막이 삼아 그뒤에 숨는건 몰염치한 작태다.
지난달 24일 공수처 성명서와도 배치된다. 당시 공수처는 "과거 수사관행을 깊은 성찰없이 답습하면서 기자 등 일반인과 정치인 통신자료 조회 논란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된 점,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수사업무개선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했다.
기존 검경 수사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을 시인하고 유감표명을 한것이다.
이랬는데 김 처장이 일주일만에 "뭐가 문제냐"며 적반하장식으로 나오는건 국민을 우롱하는것이다.
법원이 발급한 영장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할 만큼 실력도 없는 것도 문제지만 인권의식까지 바닥이라면 더 심각한 문제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의 3일 신년사는 충격적이다.
"사찰의 DNA가 없다"는 정권이 공수처의 민간인 사찰논란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되레 "권력기관이 더 이상 국민위에서 군림하지 못하도록 권력기관 개혁을 제도화했다"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했다.
"언론 자유와 인권이 신장된 나라가 됐다"고도 했다. 귀를 의심했다.
괴물 공수처가 야당의원, 언론인, 대학생 등 민간인 통신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조회한건 헌법이 보장한 언론 자유와 통신 비밀 등 기본권을 훼손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반헌법적 행위다. 그런데도 모르쇠로 일관한채 '권력기관 개혁과 언론자유 인권신장'을 자화자찬한건 이해하기 힘들다.
유체이탈을 넘어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과 대통령의 무심함이 참담하다.
이제 대통령이 면죄
공수처가 이 글을 읽고 필자의 통신정보 조회를 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어쩌다 평범한 장삼이사들이 수시로 공수처의 통신조회 여부를 통신사에 확인해봐야하는 나라가 됐는지 안타깝다.
누구 이런 나라를 만들었나.
[박봉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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