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태원 사태 포함 재난에 취약한 시스템 개선해야
"재난 이후 중장기적 지원 나설 전문가 재단 설립하자" 제안
"재난 이후 중장기적 지원 나설 전문가 재단 설립하자" 제안
↑ 보건복지부 제공 |
"지친 우리부 직원들은 누가 위로해 주나요"
보건복지부 실명게시판에 올라온 글 제목입니다. 복지부를 출입하는 기자인 필자도 그동안 복지부 공무원의 피로 누적을 우려했고, 이 글에 공감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 내내 복지부는 초비상이었습니다. 이태원 사태 뒤에도 치료받는 환자에게 복지부 공무원을 1대 1 매칭한다고 대책을 내놨습니다.
게시글을 올린 이는 "직원들에 대한 배려 없이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고 호소했습니다. 무슨 사태만 터지면 차출하는데, 시스템에 의한 차출이 아니라 마구잡이식 차출이라는 불만이 큽니다.
공무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니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할 각오는 늘 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인 위기 앞에 정부가 무한 책임을 강조하는 모습도 높일 살만합니다. 다만, 공무원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위기 상황 때마다 공무원이 모든 일을 다 도맡아서 해야 한다는 발상은 위험합니다. 실제 일을 수행해야 하는 실무 공무원은 위의 게시글처럼 한두 번은 내 일이니까 묵묵히 하다가도 결국 희생만 강요당하는 현실에 절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전문가가 많습니다. 공무원이 떠안는 게 아니라 전문가를 현장에 보내야겠죠.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들에게 맡기는 게 옳지 않을까요. 정부는 전문가를 활용할 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무원의 희생이 가치가 있을 겁니다.
지난달 25일, 이태원 사태가 터지기 직전 국회에서는 자살예방포럼 5차 정책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위드코로나 시대, 재난정신건강과 자살예방'이 주제였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당시 토론회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영상 보기 (click)
토론회 내용을 요약해보겠습니다.
포럼은 코로나19 대유행을 사회적 재난으로 봤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가족과 지인이 사망하고, 사회적 거리두기 장기화로 삶의 터전을 잃기도 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환자 수는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2020년 220만여 명에서 지난해에는 300만 명 이상으로 급증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국민의 자살생각은 올해 9월 조사에서 12.8%로 늘었습니다. 현진희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연구 결과 코로나19 사태 이후 남성의 자살 생각 비율이 올랐다고 지적했습니다. 지난해 6월 조사에서 중·고등학생을 포함한 청소년 자살생각은 평균 10.17%였고, 남성은 11.44%로, 여성 8.96%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올해 6월 조사에서 성인 남성의 자살생각은 13.51%로, 여성 11.87%를 상회했습니다. 보건소 대응인력도 심각했습니다. 남성의 자살생각은 지난해 6월 16.03%에서 지난해 11월 23.1%로 올랐습니다. 여성을 합한 평균은 19.8%입니다. 코로나19 사태는 이제 종식을 논하고 있는데, 자살생각은 오르는 겁니다. 재난 이후 2~3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살이 증가했다는 해외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포럼은 재난과도 같은 코로나19의 사회적 여파를 지금부터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책임은 정부에 있습니다.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 약칭 자살예방법이 있습니다. 자살예방법 1조에는 자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책무와 예방정책을 강조합니다. 3조 1항에서는 "국민은 자살위험에 노출되거나 스스로 노출되었다고 판단될 경우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 도움을 요청할 권리가 있다"고 정했습니다. 자살 문제는 국가의 숙제라는 겁니다.
이화영 순천향의대 천안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이 교수는 해외 사례를 예시로 들었습니다. 캐나다는 취약계층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웹사이트를 통해 정신건강을 포함한 서비스 종합 지원하고 있습니다. 호주는 2020년 코로나19로 인한 정신건강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17조 원을 투입했고, 코로나19 우울 관련 온라인 채팅을 24시간 상담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19일 집계한 대국민 심층상담 운영실적을 보면, 고위험군에 대한 심리지원은 1,726건이었습니다. 이 교수는 범부처와 지자체의 협력이 중요하다면서, 준비된 전문가 양성과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이 가운데 솔깃한 부분은 재난 관련 재단을 설치해 민간의 우수한 인력을 유연하게 이용해야 한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재난이 발생하면 지원인력을 교육하고 투입할 정부와 민간의 연결 조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정부가 직접 지원에 나서는 게 아니라 이같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다시 이태원 사태를 보겠습니다. 지난 11월 4일 정부는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입원 중인 부상자 총 35명에게 복지부 공무원을 매칭하여 의료비 지원사항을 자세히 안내하는 등 밀착 지원하고 있는데요. 10월 30일부터 유가족과 부상자 등에게는 국가트라우마센터, 정신건강복지센터, 마음안심버스 등을 통해 심리상담 1,200여 건, 정보 제공 1,060여 건 등을 지원하였습니다."
사건 발생 뒤 심리상담이 대폭 늘었습니다. 혹자는 이태원 사태를 보며 과거의 트라우마 상황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2010년 천안함 사건 때 의무병으로 복무해 시체를 봐야 했고 장례 전 절차를 진행했던 A씨는 1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이태원 사태에 다시 그때의 참혹한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재난과도 같은 사태가 발생했을 때 요즘처럼 심리지원을 정부가 해주는 경우는 과거에는 드물었습니다. 제대로 치료하지 못했던 트라우마 상황에서의 심리적 손상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남은 사건은 적지 않았습니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바로 떠오르는 분도 많을 겁니다. 이태원 사태 이후 사망자가 발생한 학교와 직장에서는 심리지원 요청이 쇄도했습니다. 국민 수준은 심리지원을 요구할 정도로 높아졌지만, 일일이 정부는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재난은 피해자의 삶을 송두리째 흔듭니다. 정신적인 문제만 생기는 게 아닙니다. MBN에서는 '재난 그 후' 기획 리포트를 올해 8월부터 방영하며, 다섯 차례에 걸쳐 문제점을 진단했습니다.
[재난 그 후①] [단독] "고사리 팔아 생계유지"…재난 지역 빈곤층 증가 2배 높아
[재난 그 후②] 방치되는 정신적 고통…"3년 지났지만 여전한 트라우마“
[재난 그 후③][단독]이재민과는 소송, 구청은 '신축'…특별재난지역 예산 전수분석
[재난 그 후④] 복구예산 끝까지 감시하는 일본…"부정 사용하면 전액 반환"
[재난 그 후⑤] 이재민 복구비만 5천만 원 '상한'…지원금은 17년째 '요지부동'
산불과 수해 피해를 입은 현장을 찾아가 지금 피해자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취재했습니다.
요약하면 이들에게는 크게 4가지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 정부와 지자체에 대한 불신, 현실에 맞지 않는 지원이 이들의 삶을 힘들게 했습니다.
기사 내용을 간략히 훑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경제적인 고통입니다. 2019년 고성 산불로, 농장을 잃은 농장주는 3년이 지났는데 집도 없이 창고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원금이 계속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생계가 막막한 이재민들은 잿더미로 변한 산에 올라 고사리를 캤다고 합니다. MBN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2011년부터 2019년까지,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된 111개 지역의 근로와 재산형태 자료를 입수해 분석했습니다. 특별재난지역에서는 잠재적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차상위계층이 재난 발생 1년 후에 7.2%, 2년 후에는 13.9% 증가해 전국 평균보다 2배 이상 높은 수치를 보였습니다.
믿고 기댈 곳이 없다는 점도 문제였습니다. 2011년 이후 12년 동안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167곳의 예산 사용내역 2만 4천여 건을 입수해 전수 분석했습니다. 특별재난지역 복구를 위해 지자체에 지급된 행정안전부 국비는 모두 1조 5천억 원이었는데, 이중 이재민들의 사유시설 복구를 위해 쓰인 건 30%에 불과했습니다.
지원금 규모는 현실에 맞지 않았습니다. 피해액이 13억 원인 사례는 정부 지원금이 최대 5천만 원 복구비와 1.9% 저금리 긴급 융자가 다였습니다.
정신적인 고통도 심각했습니다. 취재진이 정신과 전문의와 함께 고성 산불 이재민 10여 명을 상담한 결과, 3년이 지난 지금도 대부분 '치료가 필요한 상태'로 진단했습니다. 모든 걸 잃고 나서 극단적 선택을 한 농민의 가족은 정신적 충격을 받아 아직도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포항지진 피해 주민은 10명 중 4명은 여전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피해를 입은 국민 역시 재난지역의 피해 주민과 유사한 상황입니다. 경제적인 고통과 현실에 맞지 않는 지원, 정부와 공동체에 대한 불신, 정신적인 고통까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위험요소가 더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일상 회복을 시작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는 점입니다. 남들은 다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사회적 거리두기로 삶이 피폐해진 분들은 더 큰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재난 이후 가장 먼저 돌봐야 할 분들입니다. 이태원 사태 역시 트라우마 상황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이어지지 않도록 중장기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정부와 민간을 연결할 재난 관련 재단의 첫 번째 역할은 정신과 전문의와 심리상담 전문가 풀입니다.
미국은 '재난정신의료지원단(DPO)'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가입할 수 있는 재단입니다. 재난이 발생하면 연방 정부가 재단을 통해 정신과 의사를 현장에 보내는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체류비와 인건비로 얼마를 줄지 미리 정해놨으니 혼란을 겪을 일도 없습니다. (재해 정신과 아웃리치)
가칭 '재난 전문가 재단'은 정신건강 서비스에 더해 경제적 지원도 함께 도모할 수 있습니다. 설계하기 나름입니다. 피해자에게 정부의 지원책을 알리고 지자체의 복지 지원을 연결할 전문가가 있다면 몰라서 지원을 못 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경제 지원 전문가는 좀 더 현실적인 지원책을 만들도록 정부에 피드백도 줄 수 있습니다.
MBN 취재진은 재난 강국으로 불리는 일본을 찾아 '재난 그 후'의 해법을 모색했습니다. 일본은 재난이 발생하면 72시간 안에 전문 심리지원팀 출동했고, 10년 넘게 관리하며 중장기적인 치유를 지원합니다. 피해 수준에 따라 최대 50억 원의 재건지원금을 지급하는데, 무상지원인 만큼 대행업체와 전문 변호사를 통해 피해 증빙 과정을 까다롭게 확인했습니다. 우리나라의 특별재난지역 복구 지원금은 상한 5천만 원이 2005년 처음 설정된 이후 단 한 차례도 개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피해보상 지원처럼 우리나라도 철저한 검증을 통해 실제 피해액을 보상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주먹구구식 보상책은 절망에 빠진 재난 피해자를 구할 수 없습니다. 특히 경제적 보상을 할 땐, 대상자의 사회적 자존감을 지켜줘야 합니다. 세심하고 장기적인 살핌을 할 전문가 지원 시스템, 이 시스템을 만드는 게 바로 정부가 할 일입니다.
[이혁준 기자 / 사회정책부]